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hhhhye Aug 29. 2023

내가 전과자가 된 이유

덕분에 벗어날 수 있었어요.




"실력 없으면 피해 주지 말고 얼른 나가요."
내 첫 발표이자 마지막 발표였던 날.



대학교 입학한 지 한 달 정도 된 따끈따끈한 20살 새내기인 내가 교수님에게 들었던 말. 지금의 내가 저런 말을 들었다면 “대학에서 몇 년을 배웠어도 내 실력이 부족하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온 지 고작 한 달도 안 된 신입생에게 전공실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이건 마치 갓난아기에게 언어능력이 부족하다고 혼내는 느낌이었다. 매번 과제에 관한 피드백은 없이 이해 안 되는 말만 늘어놓는 교수님의 수업을 한 학기 동안 듣다 보니 혼란스럽기만 했다. 할 수 있는 게 없는 수업에서 난 뭘 배워야 할까. 고등학생 때 대학전공 공부를 미리 해야 했나. 내가 그렇게나 별로인가. 자책만 늘었다. 그렇게 내 20살의 겨울과 봄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래도 1년은 해보고 결정하는 게 좋지 않겠어?
낮, 밤 가릴 것 없이 매일같이 썰어댔던 스티로폼들



얼마나 울어댔으면 술주사가 우는 걸로 바뀌었다. 당시 졸업반이었던 언니가 이런 내 모습이 딱했는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곤 그래도 1년은 해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1년은 지나 봐야 이곳이 어떤 곳인지 어느 정도 파악될 것 같았다. 그렇게 1년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기로 했다. 남들 두 장 그릴 때 나는 4장 그렸다. 부족해 보일 수 있으니 더 해보자라는 마음에 힘들어 울면서라도 더 그렸다. 우리의 수업은 매번 과제에 A, B, C, D 등급을 매겼다. 그리고 그걸 누적한 결과로 학점을 매기는 방식이었다.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가도 항상 C였다. 그래서 난 교수님이 그냥 내 자체를 싫어한다고 매번 느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친한 친구가 과제를 한번 대신해 주겠다고 했다. 너의 말이 맞는지 한번 확인해 보자고. 그래서 그 친구가 본인 것과 나의 것 2장을 그려 이름만 달리 제출하였다. 처음 도면이 더 잘 그려진 것 같다며 그걸 나에게 주던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그렇게 제출 후, 점수가 채점된 도면을 교수님 책상에서 찾아갔다. 친구는 A였고 난 또 C였다. 친구가 내 과제를 대신해 준 걸 대부분의 친구들이 알고 있었기에 다들 벙쪄 아무 말도 안 했다. 혹시나 했던 내 자격지심과 같았던 그 생각이 진짜였다는 황당함에 나도 벙쪄버렸다. 그리고 난 친구들이 앞에서 내 생각이 맞다는 걸 확인하고 씁쓸하게 속으로 다짐했다. “ 할 만큼 다 했다. 그만하자 "




해도 안 되는 것 투성이여서요.




나는 반년을 버티다 결국 9월에 그 수업을 철회했다. 건축학과에서 설계수업을 철회했다는 건 떠나겠다는 의미였다. 철회서를 작성하고 친구들에게 그만둔다는 소식을 미리 알렸다. 행동 하나에 눈치 보고 고민하는 내가 철회한다는 말을 끝으로 진짜 철회서를 들고 오니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교수실로 찾아갔다. 교수님은  무슨 볼일이 있냐는 듯 쳐다보았고 나는 바로 철회서를 내밀었다. 그러자 교수님이 철회를 막았다. 이 종이를 자신이 가지고 있을 테니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이번주에 다시 찾아오라고. 딱 보아하니 학과 정원이 줄어드는 것에 부담을 느낀 모양이다. 나는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과 함께 교수실 밖으로 나왔다. 난 내일 바로 사인받으러 갈 거였다. 허나 그 자리에서 바로 사인받지 않았던 이유는 교수님도 나 때문에 하루라도 곤란해하고 신경 쓰였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 철회서가 교수님 책상에서 아른 거리기를. 하루라도 교수님 마음이 불편해하길 바라는 나의 투정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 다시 찾아갔고 바로 사인을 해달라 했다. 그제야 교수님이 물었다.



“ 왜 그만두려 해요? ”

“ 정말 열심히 했는데 해도 안 되는 것 투성이라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해도 안 되는 것 투성이라는 말. 교수님이 눈치채줬으면 하는 마음에 썼던 말이다. 내가 공부를 배우는 그곳은 정말 해도 안 되는 것 투성이었다. 나는 남자가 될 수도 없고, 몇 년 동안 학교를 다녀본 23, 25살처럼 유연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수업을 듣는 그 교실엔 그럴 수 있는 사람투성이었다. 15명 조금 못 되는 정원에 20살은 고작 3명이었다. 복학, 편입, 전과 등 다 언니, 오빠들 투성이었다. 키 작고 조그만 여자보단 듬직한 남자가 좋았던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 어린것들 말고 눈치 빠른 언니, 오빠들이 좋았던 거다. 이건 내가 아닌 모두가 암묵적으로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교수님이 남자 좋아하는 걸 어째”라는 말이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위로였겠지.




정말 오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고교시절 3년을 준비했던 결과가 몇 개월 만에 무너질 줄은 몰랐다.




화도 나고 아쉽기도 하고 별에 별 마음에 많이 울었지만, 가장 눈물이 났던 이유는 처음 가져본 내 꿈이 틀렸다고 확인받는 것 같은 마음에 아팠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때, 처음으로 뭔가 돼보고 싶었다. 그게 건축가였다. 2미터도 안 되는 사람이 몇 백 미터의 공간을 창조해 낸다는 것에 처음으로 사람에게 거대한 압도감을 느꼈다. 내가 우주의 먼지가 아니라 별쯤은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3년 동안 건축학과 하나만 보고 생활기록부를 채워 넣었다. 내가 가진 첫 꿈이니 소중하게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문과가 적성이었지만 공대로 가야 하니 이과로 진학하였고,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 건축서적을 읽어 독서활동을 채우고, 건축동아리도 자율동아리로 만들어 활동하곤 했었다. 정말 건축학과만 생각하며 공부했고 준비했다. 그렇게 3년을 준비하고 들어온 곳이었다. 그런 나의 노력으로 가득 찬 3년이 몇 개월 만에 무너져버린 마음은 생각보다 더 쓰렸다.




마주치지 말자 꼭. 다시 돌아가고 싶으니
내 마지막 짐 챙기고 오던 날.



그렇게 나는 철회서를 제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축학과를 떠나버렸다. 그 당시엔 내가 학과를 떠나는 게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생각해 교수님이 아니라 학과 공부가 맞지 않아 떠난다고 친구들에게 설명했지만, 당연히 교수님의 영향이 제일 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건축공부 더 해보고 싶었고 계속 남아있고 싶었다. 쿰쿰한 설계실이 좋았다. 나도 건축모형 하나 더 만들어보고 싶었다. 밤새면서 못 자더라도 나의 것을 만드는 게 좋았다. 그리고 선배들이 말해주었던 가을에 진행한다는 그 프로젝트 나도 해보고 싶었다. 심지어 그런 프로젝트를 한다는 선배의 말에 두근거려 나는 미리 자료조사도 다 해놨을 정도였다. 이건 제일 친한 친구도 모르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남아있는 친구들의 인스타그램, 카카오톡은 괜히 빠르게 넘겨 보지 않으려 했다. 내가 익숙했던 그 풍경이 또 보이면, 마음속이 또 요동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젠 이 상황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다시 시작할지 고민해야 했다.




한 층위로 도망간 전과자입니다.
같은 빛이 들어와도 공간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달랐다.



최대한 이곳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편입을 생각하고 남은 이수학점을 채우기 위해 다른 교양수업과 전공수업 한 개는 마저 듣고 있었다. 그러다 수업에 한 번 늦을 뻔한 적이 있다. 내가 쓰는 공대건물은 엘리베이터가 홀수, 짝수 층으로 2대로 분리되어 있었다. 나는 매번 5층인 건축학과를 가기 위해 홀수층 엘리베이터를 탔지만, 시간이 없을 땐 짝수층 엘리베이터를 타 6층에서 내려 계단으로 뛰어내려 가곤 한다. 그날이 딱 그랬다. 6층에서 내려 5층으로 뛰어 내려가려다 6층의 풍경을 우연히 보였고 내가 있던 설계실에서 보이지 않던 생기가 느껴졌다. 편입을 고려하던 내 머릿속에 문득, 이왕 망한 거 전과도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디자인과로 전과하게 되었다. 멀리 도망가려 했던 내가 고작 한 층위로 간 것이다. 하지만 이 전과자의 가까운 도망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정말 우스울 정도로 디자인과 잘 맞았고 금방 적응했다. 친구들은 매번 “이런 얘가 건축에서 어떻게 있었지?”라는 질문을 하곤 했을 정도니.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기이지만, 내가 나온 이후 학과에 불미스러운 일도 더러 있었다. 얽히지 않고 나올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먼 훗날의 당신이 내린 최선이었을 거예요.
철회서 제출하고 펑펑 울며 집에 와서 a4에 몇 자 적었던 날.



많이 울고 후회하다 내린 생각 하나가 있다. 모든 일은 먼 훗날의 내가 내린 최선의 선택일 것이라는 것. 지금 일어나는 좋고, 나쁜 모든 일이 먼 훗날 나에게 필요한 경험이라 겪고 있는 중이라고. 마치 3년이란 시간이 몇 개월 만에 무너지는 기분에 허덕였던 건 오랜 시간의 미련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이 나에게 필요했기 때문이고, 한 층위로 도망치듯 떠난 건 아무 계단이나 올라가 볼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게 필요했던 것처럼. 아무리 많은 사람과 연결된 세상이라 해도 모든 일의 시작과 끝에 오롯이 나만 세워두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가 나를 이해시키는 것이다. 나의 모든 행동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나의 상황과 선택이 미워지는 날이 적어졌다. 아프지 않아서 좋았다. 이쯤 되니 그 교수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 것 같다.



" 내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




작가의 이전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