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추억만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깟 종이쪼가리 뭐 하러 챙겨?
나는 물건을 사는 대로 영수증을 받는 편이다. 어릴 적 엄마와 마트를 다닐 때 매번 영수증을 챙겨 확인하는 엄마의 영향이 컸다. 물론 나는 챙기기만 하고 확인은 잘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하나둘씩 받은 영수증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방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 쌓이기 시작한다. 그게 눈에 띄면 그제야 가방을 뒤집고 털어 버리는 게 내 방식이다. 별 필요 없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굳이 그깟 종이쪼가리를 뭐 하러 받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의 말이 쓸모없는 잔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습관은 쉽게 고치기 어려운 법이었고 나는 계속해 영수증을 채워놓고 버리고를 반복했다. 버리지 못하는 영수증이 생기기 전까지.
살에 스친 기억.
바쁘다는 핑계로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꽤 있었다.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새로 사 온 책을 정리하려 책장을 둘러보다 깨달았다. 그래서 남은 것들을 다 읽을 때까지 책을 사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한 권씩 읽어나갔다. 주말 하루종일 읽다 보니 금방 줄어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책이었다. 나는 가벼운 마음과 함께 책의 첫 장을 넘겼다. 책을 넘기자 작고 가벼운 하얀 종이가 내 몸을 스치다 발밑으로 떨어졌다. 2022년 9월 1일 오후 5시 46분.
2022년 9월 1일 오후 5시 46분
2022년 9월이었다. 아르바이트와 팀프로젝트 그리고 개인작업에 24시간을 꽉꽉 채워 보내고 있던 늦여름 어느 날. 팀플작업이 미뤄지면서 나에게 2시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 시간은 오후 5-7시로 해가 질 무렵의 따뜻한 하늘을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매번 건물 안에서 노을을 바라본 나이기에 오늘은 무조건 밖에 나가 이 따뜻한 하늘의 온기를 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돌려놓은 빨래를 얼른 널어놓고 책방으로 산책을 갔다. 책방으로 가는 길에 맑은 하늘, 공기 그리고 새소리 이 세조합은 내 안에 있는 묵은 감정들을 털털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책방을 가는 마지막 코너길에 들어설 때 가장 두근거렸었다. 같은 동네이지만, 다른 세계의 발을 들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어진다. 그렇게 책방에 들어가 책을 구매하고 근처 카페에서 빵과 커피까지 샀다. 포장이 되는 시간 동안 카페밖 은행나무 아래 누워있는 고양이와 눈인사도 했다. 산 것들을 손에 가득 쥐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왔더니 마치 해가 “너의 자유시간이 곧 끝나가네. 안녕!”이라고 작별인사라도 하듯 붉게 하늘이 변해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치열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늦여름 잠시 여유 부렸던 2시간은 정말 별거 없던 잔잔한 시간이었다. 집 - 책방 - 카페 - 집. 그래서 소중했다. 나는 잔잔한 마음이 필요했고 충분히 채워 넣었다. 잊으려 하진 않았지만, 자연스레 별거 없던 2시간의 기억은 바쁜 일상에 묻혀갔다.
참으로 따뜻한 하얀 종이
묻혀있던 기억을 꺼내준 건 다름 아닌 조그마한 영수증 한 장이었다. 가방을 들고 가지 않았던 그날, 나는 아마 책 사이에 영수증을 끼워 넣었을 것이다. 그 종이는 1년이 지난 후에야 자취방을 떠나 이사박스 이곳저곳을 떠돌다 본가에서 나와 다시 만난 것이다. 얇디얇은 영수증에 빼곡히 쓰여있는 시간, 장소, 결제금액 등 글씨를 하나씩 읽어나갔다. 그때의 기억이 사근사근 떠올랐다. 참으로 따뜻했다. 작지만 이야기가 담긴 종이. 나는 영수증을 한참 살피다 다시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버리지 못하는 영수증이 생긴 순간이었다.
'영수증을 챙겨둬 우리의 추억을 위해'
바코드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환불/교환이 아닌 추억을 위해 영수증을 챙긴다는 것. 그깟 종이쪼가리가 아니라 추억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 가벼운 흰 종이에서 만난 기억은 그리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과거의 나를 기억해 냈다는 가벼운 성취감과 옅은 웃음 정도였다. 나는 이런 가벼운 마음이 좋다. 엄청난 행복과 슬픔은 없었으면 좋겠다. 너무 무거운 추억은 때때로 공허하게 만들기에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다. 마치 영수증 너처럼. 살에 스치듯 가볍게 기억할 수 있는, 입가에 옅은 웃음이 날 정도의 추억만 가지고 살고 싶다. 우리 사진과 대화로 기억하는 것도 좋지만, 영수증으로 서로 기억한다면 참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영수증을 물건 사이에 끼워 넣는다. 너와 내가 스치듯 만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