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인데 히키코모리이고, 방구석에서 루마니아 언어를 독학 마스터하더니 그 나라 작가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영화나 드라마도 아닌 실제 '사이토 뎃초'에게 일어난 놀라운 실화다. 다른 언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는 '줌파 라히리' 뿐인 줄 알았던 나의 세계에, 문을 발칵 열고 찾아온 이 사람은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독특한 색으로 페이지를 물들였다.
요즘 은둔, 고립 청년의 문제가 심각하다. 필자는 청년 현장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모습을 봐왔기에 저자가 히키코모리란 사실에 색안경을 끼고 봤었다. 방문을 틀어 잠그고 오로지 한 세계에 몰입하거나 대부분을 잠에 취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어떤 무기력한 인간을 떠올리며. 하지만 사이토 뎃초는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모종의 이유로 사회와 단절한 히키코모리라 칭했지만, 가족이나 사회가 바라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뿐이다. 나름의 활력이 있고 좋아하는 책과 영활르 보기 위해 용기 내 세상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집구석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은 채로'라는 노란 띠지에 적힌 문구와 같은 모습이 있기도, 때론 없기도 하다. 사람을 어떤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만큼 그 역시도 좋아하는 대상이 있고 열렬히 표현하며 그를 위한 활동을 서슴없이 표출하고 다닌다. 책 중간에 자신이 히키코모리인지 자신도 자문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언어에 갇히지 않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부러웠다. 그래서 힙키코모리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 같았다. 나를 표현하는 진정한 힙함을 갖췄기에.
나는 언어란 인간의 의식을 상정하는 가장 으뜸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언어가 없으면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평소 사용하는 '블랙'이라는 단어가 지금 말한 것처럼 부정적 이미지와 연관되는 것에만 쓰이면 '블랙'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고가 자리 잡는다. 그러면 흑인에 대한 차별 의식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표현을 바꿔야 하고, 이런 것을 바꾸지 않으면 인간이란 존재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나의 이 주장을 두고 '고토바카리'라고 비난해도 좋다. (p. 40)
루마니아 영화를 본 뒤, 언어에 빠져 루마니아어를 덕질한 그는 한 자라도 정확히 제 뜻에 맞게 옮기고 표현하고 싶어 한다. 인터넷에서 만난 친구들은 그를 아낌없이 칭찬하고 도와주며, 뜻하지 않은 기회로 그를 데려간다. 바로 알았다. 이건 덕질의 순기능임을.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해 본 사람은 안다. 그로 인해 어떤 우환이 와도 이겨낼 힘이 생긴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자가 찾아가는 학습자라서 좋았다. 말을 고르고 가리며 적확한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은 단순히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고 기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산물이었을 뿐이다. 언어 자체가 아름답고 숭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가 언어를 단순히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어와 함께 성장하고 나아갔기에 장을 넘길 때마다 내가 모르는 언어도 상황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마법을 지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필자는 언어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외국어는 외계어였고, 국어는 좋아하지만 친해질 수 없는 관계였다. 그건 모두 점수로 평가되는 환경에서 언어를 배워왔기에 그러했다. 좋아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결코 친해질 수 없는 벽이라는 게 있었다.
사이토 뎃초를 보며 언어를 바로 보게 되었다. 언어는 의사소통 도구도, 문법의 오류를 잡아내는 학문도 아니다. 언어는 자기표현을 위한 통도다. 내 생각과 마음을 자유로이 발화하는 데 필요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쓰는 글도 나의 자유를 위해 쓰고 있다. 어느샌가 묵직하게 들어선 무난함이라는 돌이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삶을 사는 저자를 통해 깨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