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동창회에서 진갑을 기념해 단체 소풍을 가기로 했습니다.
11월 8일, 단풍이 절정에 이른 날. 목적지는 백양사와 강천사.
버스는 전주 월드컵경기장 정문에서 8시 30분부터 50분 사이 탑승 후, 8시 50분에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나는 평소 동창 모임에 자주 참석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함께하자고 먼저 권유해 준 친구가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그 친구는 “내가 차를 몰고 네 집까지 갈게. 같이 가자”라고 했지만 나는 굳이 친구를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내 차로 갈게”라고 사양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주 월드컵경기장’을 ‘전주 종합경기장’으로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몇 차례 관광버스를 타고 야유회를 갈 때에는 늘 종합경기장에서 탔고,
월드컵경기장은 군산으로 낚시 갈 때나 서울 결혼식 갈 때 모이던 장소였습니다.
경험이 쌓여 굳어진 무의식은 안내문 속 문자를 무시하고
당연하다는 듯 종합경기장으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8시 20분, 종합경기장에 도착했지만 버스는커녕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습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자 그는 말했습니다.
“다들 월드컵경기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너 어디야?”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나는 급히 차를 돌려 월드컵경기장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8시 45분에 도착해 무사히 버스에 올랐지만,
창피해서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좀 늦었어.”라고만 둘러댔습니다.
뒤늦게 온 몇몇 친구들 때문에 버스는 9시에 출발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버스 창밖을 보는데,
내 실수 때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올해는 윤년이 있어 단풍이 절정은 아니었지만 백양사 단풍길을 걸으며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청둥오리 전골로 이름난 유진정에서 점심을 먹고,
강천산 군립공원으로 이동했습니다.
단풍철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 버스는 중간에 통제되었고,
우리는 코끼리열차를 타고 매표소까지 이동했습니다.
강천산 길을 걸으며 나는 아침의 해프닝을 친구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종합경기장으로 갔다가 허둥지둥 달려온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 숨어 있던 ‘습관과 무의식의 무서움’에 대하여.
강천산을 둘러본 뒤 미가식당에서 갈치·병어조림과 옻닭을 맛있게 먹고 전주로 돌아왔습니다.
마침 전북현대 축구 경기가 열리던 날이었고, 전북 현대가 우승을 하여
월드컵경기장 주변은 우승 축하 인파로 가득했습니다.
그날 나는 작은 실수 한 번으로 다시 깨달았습니다.
습관은 편리하지만,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다른 길로 데려가기도 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