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
새벽 버스를 탔다.
눈떠보니 4시. 곧장 부엌으로 갔다. 순식간에 각기 다른 드레싱 3개를 만들어 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양배추와 단호박도 쪄서는 스테인리스통에 야물게 담았다. 그렇게 부엌에서 달그락 달그락 하는 사이,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다. 청양고추와 마늘도 사야하고... 산책 겸 간만에 새벽시장에 다녀올까? 재래시장에서 장보는 걸 워낙 좋아해서, 즐거워해서, 특히나 새벽 시장의 바이브를 좋아하는터라 늘상 있는 일이면서도 오늘 새벽 시장의 방문은 분명 즉흥적이긴 했다.
새벽 버스여도 사람들로 북적댄다. 한참을 가서는 목적지에 내렸다. 내가 가는 새벽 시장은 천변을 따라 열리는 장터다. 개울소리를 벗삼아 내가 좋아하는 모먼트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양과 가격은 정말이지 소위 개꿀.이다.
아직은 어두컴컴한 풍경. 버스에서 내려 저 멀리 보이는 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장의 행렬이 보인다. 사뭇 비장한 마음으로 전진한다. 설렘이다. 천변을 따라 빨래줄처럼 늘어진 작은 전구들이 농수산물을 영롱하게 비추고 있었다. 확실하게 사야할 것은 청양고추, 마늘이었고 나머지는 즉흥적으로 살 계획이었다. 늘 이곳에 오면 혼잣말로 "세상에! 어쩜...!"이런 방식으로 감탄을 하는데, 청양고추도 마트에서 사면 곱절이다. 빨간 바구니 한가득 쌓아올린 것이 3,000원. 마늘도 한바구니에 3,000원. 게다가 싱싱하다. 신선하다.
아주머니, 할머니들과 나누는 짤막한 대화도 정겹고 다정하다. 방긋하면 덤으로 조금 더 얹어주시기도. 어릴적부터 엄마를 따라 재래시장을 자주 다니기도 했고 고등학교 이후 독립하면서는 주말에 내려오면 엄마는 꼭 새벽에 나를 깨워 새벽 시장까지 드라이브 겸 장을 함께 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로 한 상 가득 아침을 차려주셨다.
장을 보다 보면 어느 새 천원 짜리, 오천원 짜리, 만 원짜리 지폐가 늘어난 짐만큼이나 꼬깃해진다. 정말 소소하지만, 사소하지만 내겐 더할나위 없는 낭만이고 즐거움이고 기쁨이다. 내가 하면 기분좋아지는 것들 중 하나다. 나이들어서도 변함없을.
뚜벅이인 관계로, 또 좀처럼 택시를 타지 않는 성미라 버스 탈 것을 감안해 적당히 장을 봐야 한다. 너무 무겁지 않게. 또 이왕 왔으니 너무 가볍지 않게. 알뜰하게 살뜰하게 장보기.
청양고추, 마늘, 섬초, 도토리묵, 오징어 2마리. 양배추 1통을 샀다. 실은 집 앞 마트에서도 곧장 살 수 있는 것들이다. 단순히 가격이 몇 백원, 몇 천원 싸다고 해서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오는 건 아니다. 오며가며 시간을 생각하면 어쩌면 효율로만 본다면 집 근처에서 장보는 것이 더 이득일지도 모른다.
애써 발걸음을 옮기는 곳. 절로 발걸음이 향하는 곳. 구태여 가야만 하는 곳.이 된다.
이 시간 새벽시장은 나와 같은, 내 또래의 젊은이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재래시장 방문은 늘 내게 고상한 볼거리. 사람이 있는 곳. 살아있는 곳이 된다.
재래시장, 새벽시장 분위기와 감성을 사랑하는 덕분이다. 날 기분좋게 해주는데다, 양도 많고 가격까지 저렴하니 만족이 배가 되는 것도 있다. 천변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바라만 보는데도 분주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시장 상인들의 진한 생명력, 그 바이브. 부지런함. 성실함을 보고 있자면, 나도 꼭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 자신이 이곳에선 한없이 겸손해진다.
각자 자기 생.을 살아가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들에 관하여 재래시장은 즉각적인 본보기가 되어준다. 느슨해진다 싶을 때, 의욕을 잃어갈 때, 무기력해질 때, 나 자신에게 방심하게 될 때, 나는 이곳을 찾는다.
타는 비비드함, 살아있음, 생명력, 시끌벅적함 속에 피어나는 것들. 사색하고 사유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다. 지나가다 난로를 봤다. 난로 옆을 지나는데, 그마저도 내겐 얼마나 정겹던지. 살갑던지. 그 장터 한가운데 호떡도 팔고 그 건너편엔 커피 포장마차도 있다. 새벽시장 사람들의 계절은 확실히 겨울이다. 그곳에서 1시간여 시간을 보내다 왔다.
천변 다리를 건너다 여명이 오기 직전,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본연의 하늘이 점차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저 멀리 너머 보이는 산등성이, 하늘, 내 시야 양 옆 사이로 들어오는 주황빛 조명들...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음하~ 오늘 나오기 정말 잘했어!. 나도 이렇게 살테야!. 살아있게. 묵묵하게. 묻고 따지고 할 거 없이. 인생은 살아지는거야. 지금 여기. 지금을 사는 거야.!" 흥정하는 사람들, 장사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여느 날처럼 마늘과 나물을 다듬고 계시는 어른들...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나를 돌아보았다. 나를 돌이켜보았다. 나를 반추했다.
시장 사람들 모두가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다. 각자 분주하게 자기 생.을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덕분에 나는 용기를 얻었고 생의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먹을거리로 풍성하게 걸린 내 양손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먹을거리에 대한 감사함이 절로 인다. 시장을 빠져 나오면서까지도 나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곳에서의 한 시간은 더할나위 없이 발랄하고 명랑한 순간들이었다.
10분쯤 걸었을까.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버스를 탔다. 올 때와는 다르게 다시 집으로 가는 방향 버스 안은 한산했다. 자리를 잡아 앉으니 겨울 버스 안에서 느낄수 있는 그 특유의 따뜻함. 히터의 공기.가 완연하게 내게로 밀려들었다. 사르르 녹는 듯한. 그 포근함에 "이 특유의 따뜻함. 이 또한 낭만이지... 바깥공기와 대비되는 그래서 더 포근한 다정한 살가운 버스 안 공기들... 좋다."
이대로 멈췄으면 하는, 아주 더디게 집 앞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으면 싶었을 만큼. 포근했다.
내가 재래시장을 찾는 이유.
새벽시장을 찾는 이유.
생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다.
사람사는 냄새가 향기로워서다.
생명력이 좋아서다.
따뜻해서다.
자기 생이 보여서다.
진짜라서다.
활기차고 명랑해서다.
넉넉해서다.
즐거워서다.
설레서다.
살갑고 다정해서다.
이 정취가 좋아서다.
이 바이브가 좋아서다.
다른데서 설레는 게 아니라 이런 것들에 다가가면 설레는 내가 나는 늘 반갑고 좋다.
이게 나라서.
낭만은 별 게 아니다.
이토록 사소하고 시시하고 별 거 없다.
나의 낭만은 내게서 온다. 나만이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발견하는 것이다.
내겐 이런 것들이 낭만이요, 풍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