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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그네스 May 17. 2024

인사하며 살고 싶었다.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2021년에 공공기관에서 잠깐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인사를 했었고 받았었다. 인쇄된 서류를 하나 갖다 드린 것뿐인데 진심으로 내게 고마움을 전하셨다. 별 것도 아닌 사소한 걸로도 감사하다는 말을 매일 듣는 환경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도 인사가 몸에 배었다. 조금만 감사해도 감사하다고 표현하고, 나아가 회사에서 얻은 에너지를 세상에도 공유하고 싶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낙엽을 쓸고 계시는 경비원분께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인사를 열심히 하다 보니 근무 기간이 끝났다. 여유라는 가치를 처음으로 배웠고 이 가치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 한 달 정도 스페인에 갔다 와서 또다시 일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인지도 높은 중견기업이었다. 입사 첫날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주 숨 막히는 사무실 공기에 인사는커녕 사람들이 모두 너무 바쁜 나머지 매우 지쳐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만큼은 에너지를 잃지 않고 매일 인사하고 밝게 일해야지 하고 다짐했는데 한 달 만에 나도 좀비 그룹에 합류하게 되었다. 난 그렇게 뚝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던 순간이었다.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보니 돈값을 하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일했다. 생기를 잃은 좀비가 되긴 했지만 워낙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만큼 아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근데 문제는 좀비가 된 나 자신을 스스로 견디기가 힘들었다는 거다. 매일매일 나의 필요와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압박이 심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여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았고 살 수도 없었다. 결국 하다 하다 안 되겠어서 견디지 못하고 퇴사를 했다.


그러곤 또다시 스페인에 갔다.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엔 반년 정도 살았다. 한 달 다녀왔을 때랑은 많은 게 달랐다.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사람들은 내가 꿈꾸던 여유가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지나갈 땐 틈 사이로 쇽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항상 perdón(지나갈게요)이라고 정중하게 말한 후에 지나가고, 좁은 길을 지나기 위해 양쪽에서 사람이 오면 한 사람은 무조건 멈춰서 다른 사람이 갈 때까지 기다리고 그러면 먼저 지나가는 사람은 말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게 아니라 항상 기다려준 사람에게 gracias(감사합니다)라고 고마움을 표현한다.


감사하다, 지나가겠다는 말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의외로 해보면 별 거라는 게 체감된다. 정말 많이 체감이 된다. 나는 그랬다.


여유를 잃어보고 다시 찾고 나니 이전보다 훨씬 집착이 심해졌다. 열심히 몸에 익혀온 것을 절대 잃고 싶지 않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 한 번 건넬 여유조차 없게 살고 싶지가 않았다. 인사라는 게 그렇더라. 바쁘고 힘들어도 인사 한 번에 괜히 마음이 움직이고 그런다.


어쨌든 나름대로 여러 회사를 다니면서 당시에 내렸던 결론은 일이 너무 바쁘고 힘든 회사는 사람들이 여유가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바쁘지 않은 회사가 있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회사 자체가 무서워졌다. 그런데 인생이 참 재밌는 게 아무리 다양한 경험을 해봐도 그동안의 경험으로 얻은 나름의 결론이 꼭 정답이라는 법이 없다는 거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도 충분히 바쁜데 오며 가며 항상 인사를 나누고 무엇보다 업무에 대한 압박이 없다. 이런 환경이 주어지고 여유가 보이기 시작하니 금세 내 안의 여유도 제자리를 찾았다. 출근길에 항상 뵙는 녹색어머니(지금은 다른 이름인 것 같지만ㅎ..)와도 매일 상쾌하게 아침 인사를 나누고 출근한다.


무엇보다 신기한 건 월요병이 없다. 여유란 이런 거다. 이 가치에 대한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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