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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그네스 May 25. 2024

또다시 내던져졌다.

작년에 학교를 마친 후 창업을 했다. 근데 반년만에 망했다. 그러고 취직을 했다. 이제 좀 회사원 신분에 익숙해질까 했는데 또다시 길가에 내던져졌다. 예상치 못했던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내던져진 게 아니라 스스로 몸을 내던진 거니까. 작년 초에 귀국한 후로 빠르게 학교를 마치고 다시 스페인에 돌아가겠노라 다짐한 결과였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 어느덧 출국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잠깐 다니려고 했던 회사라 경력이 있음에도 민폐 끼치기 싫어서 일부러 인턴을 찾았다. 근데 아예 예상치도 못했던 방향으로 일이 꼬이면서 상황이 좀 이상해졌다. 기존에 마케터가 없다가 처음 마케팅을 시작하는 회사였는데 그러다 보니 해야 될 게 좀 많아서 인턴이 아니라 경력직 자아로 일을 하게 됐다. 뭘 하든 다 새로 시작해야 되는 거다 보니 이미 갖춰진 틀 안에서 주어진 일만 했던 그간의 경력과 달리 새로운 일이 많았다. 워낙 도전적인 성격이고 못하겠다 보단 일단 해보겠다는 타입이라 의외로 만족도 높게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정규직 전환의 스멜을 풍기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난 어차피 떠날 사람이기에) 상당한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아직 다닐 날이 많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그만둘 예정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퇴사를 5주 정도 앞둔 시점에 퇴사 의사를 전달했고 그때 봤던 상사의 입은 웃지만 눈은 우는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마음속에선 백번도 더 잡고 싶은데 20대에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것을 차마 말릴 수가 없다고 하셨다.


한국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스페인을 잊기 시작했다. 일이 잘 맞기도 했고 또 커리어 중간에 구멍이 나면 귀찮아질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스페인 취업을 조금씩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에는 아무리 제2외국어를 해도 영어를 더 잘하는 게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2외국어는 말 그대로 틈새시장 공략이고 결국 메인 시장은 영어다. 그렇지만 이미 가기로 결심했던 것이니 마음을 다잡고 이력서부터 다듬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한국에 1년 반 있는 동안 점점 깊은 곳에 묻혀 가던 흥분과 설렘이 꿈틀댔다.


돈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 데다가 워낙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어떤 경험이든 이전에는 예상하지 못한 인풋을 잔뜩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던지라 이 흥분과 설렘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까? 대체 어떤 일을 하게 될까?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나가고 새로 인턴을 구하면 필히 지금 내 업무 중 어딘가에서 펑크가 날 것 같아서 인턴 선에서 가능한 업무와 불가능한 업무를 분리해서 프리나 재택을 제안할까 생각도 했었다. 근데 어쨌든 지금은 새로운 시작에 앞서 또다시 어딘가에 묶이기보단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 하나하나 다시 쌓아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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