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그네스 Nov 03. 2024

스페인에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적응이 빠른 사람이 서양에 갔을 때 생기는 일

마드리드에 처음 이사 와서 글을 쓰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년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스페인과 스페인어를 미친 듯이 사랑하던 내가 둘을 거들떠보기도 싫어졌다는 것. 주변에서는 이 얘기를 하면 농담하지 말라면서 믿기 어려워한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내가 이렇게 변한 걸까?


비록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외지인의 삶보다는 진짜 그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삶을 살고 싶었다. 기간과 무관하게 지금까지 항상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실제로 어딜 가든 빠르게 적응하는 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현지인의 삶일까? 현지인이 밥을 먹는 시간인 점심 2-3시, 저녁 8-9시에 밥을 먹는 게 될 수도 있고, 무언가를 양보하려고 노력하거나 신호위반을 밥먹듯이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현지인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삶은 함께 진짜 현지인들과 어울리면서 외지인 취급을 받지 않는 것이 베이스가 된다.


얼굴이 동양인인데 어떻게 외지인 취급을 안 당해?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라고 생각한다. 일례로 미국에서 평생 나고 자란 재미 교포가 외모가 동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항상 "Where are you from?"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겠는가? 영어권에 거주하지 않는 내가 이런 이질감을 느꼈던 때는 스페인어를 잘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야장천 영어만 쓰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다.


마드리드는 워낙 대도시이고 관광객도 많기 때문에 처음 봤을 때 영어를 쓰는 것까지는 백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스페인어로 대답을 해도 본인은 끝까지 영어만 사용하는 상황도 정말 많았다. 그 딴에는 배려라고 해준 걸 텐데 나에겐 그 사소한 배려가 쌓이면서 이곳에 대한 큰 거부감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편의상 교포에 비유했지만 난 교포도 아니고 이곳에서 엄청 오래 살아 모든 역사와 문화에 바삭한 것도 아니다. 나의 정체성을 이들과 동일하게 스페인 사람이라고 취급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잠시 스쳐가는 여행객이 아니라 이 사회의 일부인 거주자로 온전히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당했던 인종차별도 내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잊을만하면 상기해 주는 데에 크게 일조했다.


내가 아무리 스페인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하게 되더라도 얼굴을 갈아엎어서 백인이 되지 않는 이상 결국 난 이곳에서 끝까지 외지인 취급을 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그 뒤로는 스페인어 공부도, 스페인 생활도 점점 정이 떨어졌다.


뼛속까지 한 민족 국가인 한국에 살던 내가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절대 아니다. 한국인도 인종과 무관하게 얼굴이 한국인처럼 생기지 않은 사람만 보면 당연히 영어를 써야 된다고 생각하고 피하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더구나 미주권처럼 다문화 사회도 아니고 철저하게 백인 중심으로 굴러가던 유럽 사회에서 동양인의 외모를 한 사람은 당연히 외지인으로 학습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렇지만 난 적어도 그런 환경에서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거다.


그래도 아픈 만큼 배웠다. 한국에 돌아가서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더라도 다짜고짜 영어를 사용하거나 한국어를 잘한다는 칭찬은 자제해야겠다는 것. 나같이 거주 기간이 도합 1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어중이떠중이도 이 정도인데 오랫동안 한국에 살고 있던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잔잔한 호수에 돌 던지기란 말인가. 그것 만큼은 정말 뼈에 새기고 돌아갈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대와 달랐던 스페인에서의 크리스마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