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naissance Mar 04. 2024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

요즘 영화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오래 버티는 사람이 승리한다고. 오래 버텼기 때문에 이긴 거라고. 상업영화 데뷔 나이가 점점 높아지고 있어서 나오는 말이다. 인질로 데뷔한 필감성 감독은 40대 중반에, 올빼미로 데뷔한 안태진 감독과 데드맨으로 데뷔한 하준원 감독은 지천명이 되어서야 첫 상업영화를 개봉시켰다. 이들은 영화를 늦게 시작해서 늦게 데뷔한 것이 아니다. 프로필을 보면 세 감독 모두 2000년대 초반부터 상업영화의 스태프로 일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첫 상업영화를 하기까지 오랜시간을 영화판에서 참고 견딘 것이다. 


오래 버티다 보면 결국 기회는 주어진다는 희망,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 우린 언젠가부터 이걸 '희망고문'이라고 부르기로 하지 않았나? 사회의 중추가 되어야할 젊은 경제 인구가 고시에 몰빵하는 것을 줄이기 위해 고시의 종류를 줄이고 나이 제한을 두거나 응시 횟수에 제한을 두고 있다. 물론 정책이 한결 같지는 않아서 어떤 고시는 나이 제한이 없고 응시 횟수의 제한도 없다. 여튼 9번 떨어지고 10번 떨어지는 시험에 계속 메달려서 공부하는 것은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시간 낭비고 젊음 낭비로 보인다. 그걸 20년 하라고 하는게 지금의 영화계다. 


물론 누가 목에 칼을 대고 영화 하라고 협박하지 않았다. 본인이 원해서 한 거다. 하지만 오래 버티면 언젠가 기회가 주어질 거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많다. 내가 아무리 구애를 해도 나를 좋아해주지 않았던 이성만 몇 명이냐.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첫 장편이 국내 3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고 해서, 능력이 된다고 보기도 힘들다. 한국영화아카데미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나와 자신의 장편으로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도 상업영화 데뷔를 하지 못한 감독의 수는 얼마나 될까. 매해 부산, 전주, 부천에서 독립장편 영화에 주는 상을 5개라고 어림잡으면 1년에 15명의 신인감독이 상을 받는다. 10년간 상을 받은 사람은 150명이다. 이 중 데뷔를 10명이 했다고 치면 140명이 놀고 있다는 소리다. 나와 같은 해에 부산, 전주, 부천에서 상을 받은 신인감독 중 상업영화를 찍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물론 나와 같은 해에 상을 탄 사람들은 모두 코로나 직격탄을 맞은 사람들이라 데뷔가 더 힘들 것이다. 전년도 수상자 중에는 상업 영화 데뷔자가 꽤 나왔다. 1년의 차이로 한국 감독들의 역량이 확 떨어진게 아니라면, 코로나의 영향이 지대한 것은 맞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이 변했는데. 세상이 안 어려웠던 적은 없다. 다 자기 시대만의 어려움은 있다. 이런 상황에도 데뷔할 사람은 한다. 그러니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최선을 다 하면 결과가 좋지 않아도 아쉽지 않다는데, 난 최선을 다 했음에도 아쉽다. 오래 버티면 기회가 주어질 거라는 희망을 놓기로 했다. 내가 영화를 그만둔다고 하면 주변 감독들과 몇 배우들은 아쉬워 할 거다. 나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몇 안 되는 사람들. 그 외에 내 다음 영화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당장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시나리오를 하나 더 쓸 생각이고, 최근에 쓴 시나리오는 공모전을 돌려볼까 한다. 공모전에 돌리는게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다. 나도 당선되어 봤지만 상업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내 주변 감독들도 공모전 당선이 상업 데뷔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지만 어쩌겠나. 할 수 있는거 다 하고 그만둬야지. 지천명이 되기까지 10년이 남았다. 그때까지 버텨낼 자신이 없다. 천천히 이별을 준비 중이다. 뜨거웠던 짝사랑을 떠나보내는 느낌이다. 너무 사랑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날 좋아해줄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와 바로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점점 연락의 횟수를 줄이고, 점점 그녀의 활동반경에서 멀어지고, 그러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안 볼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소주를 들이킨 후, 죽을 때까지 보지 않을 각오를 한 후 연락처에서 그녀를 지운다. 그리고 그녀와의 마음을 정리한다. 괴롭고 힘들지만 절대 연락하지 않고, 그녀와 마주칠만한 모든 동선을 포기한다. 그렇게 멀어지면, 그녀를 잊는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만나면 아무런 느낌이 없다. 나와 영화는 그런 사이가 될 것이다. 내 짝사랑을 슬슬 정리하려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발전이라는 착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