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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aissance Apr 19. 2024

여행하듯이 살지 못하는 이유

1년 내내 여름인 바닷가로 1주일의 짧은 휴가를 다녀왔다.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오로지 쉬러 간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돌았다. 얼마만의 나홀로 여행인지. 주구장창 혼자 여행을 다녔던 30대 초반을 생각하면, 왜 부모님이 여행 한 번 가는 것에 그렇게 큰 결심이 필요한지 이제 알 것도 같다. 챙겨먹어야 할 약도 많아지고, 혹시나 아플 때를 대비하는 것 만으로 여행에 대한 기대감보다 걱정이 앞선다. 아무데서 자도, 술을 많이 마셔도, 잠을 잘 자지 못해도 다음날 온전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에너지가 있던 시절은 끝났다. 나는 지금부터 죽을때까지 오늘이 가장 컨디션이 좋은 날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행은,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만히 앉아 있어도 좋았다. 내가 한국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과 다를게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계가 망해가고 있어 일이 없는건 매한가지고, 아침에 일어나 당장 해야할 일 같은건 없다. 하루종일 가만히 앉아있어도 되는건 한국에서도 똑같다. 그렇다면 왜 나는 한국에서 여행온 것처럼 살지 못하는가.


광고계에 있을 당시에 업계에서 유명한 CD님이 책을 내서 인기를 얻었고, 방송 출연도 많이 했다. 그 분이 했던 말 중에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었던 건 ‘일상을 여행하듯이’ 살라는 말이었다. 매일 챗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서는 뇌가 자극을 받을 수 없고, 새로운 길을 가야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똑같은 출근길에도 새로운 것을 보려고 노력해야 하고, 매일 다니는 길에도 여행지에 온 것처럼 주위를 세심히 바라보라고. 나는 이게 말이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게 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싶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매일 다니는 길에서 새로움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새로운 길에 가야지. 그래서 나는 산책을 할 때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간다. 어제도 산책을 하면서 새로운 골목을 찾았다. 이 동네에 10년 가까이 살고 있는데 여전히 모르는 골목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구옥 빌라 동네로 산책을 나가서이지, 내가 만약 일산이나 분당같은 계획도시에 살고 있으면 이런 새로운 길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40년된 구옥에 살던 시절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전쟁이 끝나고 필지를 찢어 집을 지었기 때문에 생긴 말도 안되는 미로같은 골목을 탐방하는 일이었다. 그 동네에 4년을 살았지만 나는 장담컨데 그 동네의 반도 탐구하지 못했다. 길을 잘못들면 10분을 걸어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그리고 나올 수 있는 출구는 다시 돌아나오는 것 뿐이다. 이런 골목이 산재한 난이도 끝판왕 미로를 모두 탐구하는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지도를 이용하면 되지 않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골목 곳곳에 차 진입 금지 팻말이 붙어있다. 도로를 침범해 지어진 집 때문에 차가 지나갈 수가 없다. 따라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돌아다니는 차도 진입할 수 없다. 택시를 탈 때마다 집에 들어가는 길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잠에 들지 못했다. 네비대로 가면 막다른 골목에 막혔다. 나는 항상 이대로 가면 길이 막힌다고 기사님에게 설명드려야 했고, 의심을 하는 기사님들을 설득해 내가 아는 길로 안내했다. 불편한 점을 엑셀로 정리하면 몇백 줄이 나올테지만, 집 밖으로 나오면 미로가 펼쳐진다는 점은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다. 책을 쓰셨던 CD님에게 위례신도시에서 판교로 출퇴근하게 시킨 다음에 과연 일상을 여행하는 것처럼 살 수 있는지 관찰해보고 싶다. 사람은 익숙한 환경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이 훨씬 쉽다.


날씨도 한몫 한다. 한국에 돌아와 가기 전보다 덜 우울한 이유는 여행으로 스트레스가 풀려서가 아니고, 익숙한 환경으로 돌아와 편해서도 아니다. 날씨가 좋아져서다. 여행을 가기 전 한국은 추웠다. 일주일 후 돌아오니 덥더라. 나가기 전에 후드를 입고 출국 했는데, 돌아올때는 후드를 벗었다. 일주일만에 계절이 변해서 여름이 되었다. 날씨가 좋으니 산책도 많이 다니고, 새로운 곳도 발견한다. 겨울이었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과다. 나는 겨울보다 여름을 좋아하는, 선천적으로 열이 없는 체질이다. 사우나 내기에서 져본 적이 없고, 단체 운동을 하면 가장 늦게 땀이 나기 시작한다. 여름이 되면 안 더워? 라는 말을 주구장창 듣는다. 모두 땀을 흘리고 있는데 나만 멀쩡하니까. 그러니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건 당연지사다. 반대급부로 겨울이 너무너무 싫다. 어렸을땐 이정도가 아니었는데 나이들수록 그 싫은 정도가 심해진다. 인간의 기초대사량은 대부분 체온을 유지하는데 사용된다고 한다. 체온 유지에 그렇게 에너지가 많이 드는데, 나이가 들어 에너지의 총체량이 줄어들수록 힘겨워지는 건 당연한 수순. 휴가를 여름나라로 가는건 너무나 당연한 거였고,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내가 했던 미친짓은 적도 부근 나라에서 하루종일 밖에 있는 것이었다. 아플 정도로 따가운 햇살, 익을 정도의 더위를 하루종일 느끼다 왔다. 화상의 위험이나 탈진의 위험을 감수했다. 나는 그 정도로 여름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한국에서도 날씨가 좋은 날 만이라도 여행온 것처럼 생활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날씨만 좋다면 이 백수생활 여행하듯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일 당장 비가 하루종일 내린다고 한다. 지구온난화로 바뀐 지구의 기후는 한반도에 시도때도 없이 비를 쏟아붓는다. 올해까지는 영화를 계속 할 건데, 제발 날씨만이라도 좋길 바란다. 내가 버틸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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