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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aissance Aug 18. 2024

여름이었다

시나리오가 끝나고 운동이나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역도장도 연휴에 쉰다고 했다. 열대야가 계속되는 덥디 더운 여름의 한복판에 징검다리 연휴가 있으니 너도나도 쉬는 분위기였다. 쌀이 떨어져 쌀을 주문했는데 택배도 쉬어서 못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쉬라는 얘기구나 싶어서 쉬었다. 쉬니까 생각이 많아진다.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다.


달력을 보며 텅텅 비어있는 스케쥴 만큼 마음이 허기짐을 느꼈다. 스무살때부터 플래너를 쓰기 시작했고, 아이폰과 맥북이 달력 연동이 되면서부터 디지털 달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빼곡히 적혀있는 달력에 익숙해진지 이십년이 넘었다. 내 인생에 이 정도로 달력이 휑한 것은 처음이리라. 이럴땐 별것도 아닌 스케쥴을 달력에 적어서 허기짐을 달랜다. 자동차 검사, 수면제 처방 등 굳이 적어도 되지 않은 스케쥴까지 적는다. 그리고 이게 무슨 일인지 허망하게 스스로를 돌아본다. 남는 시간을 그냥 잘 쓰면 될 일이다. 


관심은 있는데 손이 가지 않는 일들을 메모해두는 습관이 있다. 메모로 남긴지 오래됐는데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하지 않을 일로 판단해 지운다. 하지만 내가 '해야해서' 적어두는 일은 지우기가 껄끄럽다. 올해 가장 오래 남아있는 메모는 '부동산 공부'와 '주식 공부'다. 일이 끊길 때를 대비해 저축해둔 여유자금이 조금 있다. 말 그대로 조금이라 1년 정도 버틸 돈이다. 이걸 굴려보려볼 요량으로, 어차피 해야할 공부라는 생각이라 유튜브로 시작해볼까 했지만 첫번째 부동산 경매 유튜브를 아직도 다 보지 못했다. 10분짜리 강의다.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은 불혹의 나이에도 존재한다. 어려을때부터 관심이 가지 않은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피아노 학원을 1년 넘게 다니고도 실력이 고만고만 했던 이유다. 음악은 좋아하기에 다시한번 악기를 해보고자 큰맘먹고 디지털 피아노를 구매했는데 먼지만 쌓이고 있다. 반드시 해야할 이유가 생기지 않으면 아마도 부동산이나 주식 공부를 끝끝내 하지 않을 공산이 높다. 남아도는 시간은 새로운 시나리오에 쓰게될 것이다. 


큰맘먹고 계곡에 갔다. 서울에서 계곡에 간다는 것은 주차장 같은 도로에서 네시간을 쓸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차난이라도 피해보고자 근처에 주차장이 개방된 국가시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계곡물은 차디 찼고, 몸을 담그니 에어컨이 없던 시절에도 더위를 피할 방법을 자연이 제공해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도시 문명이 아니었어도 인간이 살아갈 방법은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조금의 흙이라도 노출되는 꼴을 못 보고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어버리는 반자연적인 도시여야만 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물에 발을 담그고 사람들을 관찰했다. 가족과, 연인과 함께 계곡을 찾아온 사람들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물론 각자만의 슬픔과 우울이 있겠지만, 3인칭 관찰자가 그것까지 알 수는 없다. 물에 발만 담그고 있는 나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물에 뛰어드는 그들은 이 계곡을 더 만끽하고 싶어서일 거다. 그만큼 소중한 연휴일 것이다. 역도장이 쉰다는 이유로 할 일을 찾다가 온 나같은 사람보다 연휴가 소중할 것이다. 물총과 튜브까지 챙겨온 그들은, 지옥가은 교통따윈 문제될게 없었을 것이다. 


두 시간 동안 클러치 페달을 수백번 밟았다 떼고 집에 돌아오자 녹초가 되었다. 간만에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누군가를 불러 함께 마시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사실 이것도 핑계다. 부르지 않을 이유를 찾았을 뿐이다. 연락도 안 하고 술도 안 마시는 내가 간만에 술이나 마시자는 연락을 하면 무슨 일이 있느냐며 달려 나와줄 사람이 적어도 세 명은 있다. 심지어 술집을 운영하는 친한 지인도 두 명이나 있어서 거기에 가도 된다. 하지만 나는 부르지 않을 모든 이유를 동원해서 혼자 마실 수 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찾아내고 집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취기가 오르자 전두엽이 마비되면서 기분이 좋았다. 잠시나마 '내가 뭐하고 사는거지'라는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꼬리를 물어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건데'에 미치자 술잔을 놓았다. 더이상 전두엽을 마비시켜 내가 볼 수 있는 이득이 없다. 이런 식으로 술을 음용하면 몇 잔 마시지도 못하는 구나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어떻게 이 상태로도 계속 술을 들이켰는지, 그러고도 즐거웠다며 다음날 다시 술을 마실 수 있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일이 잘 풀릴때도 기분이 극도로 좋은 상태가 아니라면 대부분 술을 마시고 억울함과 비통함을 느꼈는데, 술잔을 놓지 않고 계속 마셔서 무엇을 얻고자 했던 것일까. 아예 마비가 되어서 그런 생각까지 안 나길 바랬던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책을 했다. 소나기가 왔고, 밤 공기가 선선해져서, 걷고 싶었다. 좀 걸으니 술이 깼다. 제 기능을 찾은 전두엽은 생각을 멈추고 잠이나 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계곡에 간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점이 있기는 한 걸까. 오른쪽 둔근을 잘 사용하지 못하고 40년을 살아온 것처럼, 생각을 멈추는 법을 모르고 불혹까지 산 걸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시원한 물에 감사하며 몸을 담그고 물놀이를 할 수 없는 인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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