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그만둔지 10년이 되었다. 그간 각색일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벌이가 변변치 않았다. 온갖 알바를 해가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이제 불혹을 넘겼고, 주변엔 큰 병에 걸린 사람이 생기기 시작하니 위기감이 찾아온다. 소일거리를 해가면서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그건 건강할 때의 경우다. 실존주의를 핑계삼아 노후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나에게도 현실적인 자각이 불현듯 덮치곤 한다. 그래서 올해까지만 영화에 힘을 쓰고, 내년부터는 직장을 찾으려고 생각 중이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돈을 벌려고 계획하니까 자꾸 돈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돈이 많아지면 행복할까? 돈으로 안정을 살 수 있을까?
외할아버지가 최근에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도 철저하게 숨긴 재산이 어마어마하게 많으셨다. 물론 내 기준으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워낙 돈을 악착같이 모으시는 분이니 10억대 자산가라고 다들 추측했다. 돌아가시고 나니 100억대 자산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나 동화라면 남겨진 가족들은 숨겨진 금광을 발견하고 행복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남은 가족은 불행해지고 있다. 우선 외할머니는 매우 정정하신 상태이고, 평생 구두쇠 남편에게 시달려서 당신은 교회 헌금도 눈치 보지 않고 많이 하면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셨다. 자식들은 외할머니가 주는 넉넉한 용돈으로 삶이 조금은 더 풍족해질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돈을 한 푼도 자식들에게 나누고 계시지 않는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숨겨진 금광을 자식들과 나누면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은, 특히 돈에 대한 욕심이라는 것은 이성을 아득히 넘어선 비논리, 감성의 영역이다. 100억대 자산가이면서 20년된 차를 모셨던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돈을 많이 모아놓고도 좋은 옷, 좋은 차 한번 타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본인은 아마 훨씬 오래 살 거라고 생각을 하셔서 그랬던 것일까. 나는 그가 더 오래 살았어도 끝끝내 돈을 쓰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돈을 쓰는 것보다 모으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내 주변만 해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돈이 목표가 되면 안 된다는 얘기는 흔하다. 그런 조언을 하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니지만, 대부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한다. 자신은 돈이 목표가 아니라 안정이 목표라고, 혹은 노후를 준비한다고 정당화시키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평생 당뇨로 고생하시고 합병증으로 허리와 무릎 수술을 하셔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신다. 물론 그 상태로 오래 사실 수도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당신의 삶은 그렇게 오래 남지 않으셨다. 하지만 100억대 자산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계신다. 본인의 배우자가 평생 돈을 모으기만 하다가 허망하게 떠나셨는데도, 본인도 똑같이 하고 계신다. 나는 그것을 부조리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나만 해도 큰 돈이 들어오면 컴퓨터를 바꾸겠다고 해놓고 각색 계약을 두 번을 하고 통장에 각색비가 꽂혀도 컴퓨터는 커녕 핸드폰도 바꾸지 않았다. 그 액수가 통장에 있다는 사실이, 그 액수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컴퓨터를 바꾸는 것보다 행복하기 때문이다. 벌이가 불규칙하니 영화를 하기 위해 모아놓은 시드머니, 버틸 힘이라고 정당화하지만 2-3백 만원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두세달이다. 두세달 더 영화를 하겠다고 컴퓨터를 바꾸지 않는 것이 가당키나 하나. 나조차 얼마 안 되는 돈을 모은 것에 만족하며, 쓰지 않고 살아간다. 외할머니는 그 액수가 100억대일 뿐이다.
얼마나 돈을 모아야 '노후 자금'을 충분히 모았다고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돈을 모아야 생활이 '안정'된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액수가 무한대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안정되었다고 느낄만한 돈의 액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돈은 항상 부족하고, 계속 부족할 예정이다. 돈을 아끼고 모으는 관성에서 벗어나려면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평생 해왔던 것을 바꾸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점점 에너지를 잃어간다. 아직 에너지가 남았을때 돈을 쓰는 페이스로 전환을 해야한다. 하지만 이 전환점을 당신은 정할 수 있을까? 쓰는 페이스로 전환하기엔 노후 자금이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직 안정된 생활을 하기엔 돈이 '충분히' 없다고 하지 않을까? 당신에겐 '충분히'의 액수가 정해져있나? 나는 없다. 그래서 돈을 버는 생활로의 전환이 과연 옳은 선택인지 고민이 된다. 100억대의 자산을 소유하고도 돈이 부족한데 돈을 왜 악착같이 모아야 하는걸까. 어차피 부자가 되어도 행복하지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