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별 욕심이 없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돈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이 크지 않은 편이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시계를 차고, 좋은 구두를 신고, 좋은 가방을 들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이 행복에 주는 절대적 수치가 큰 사람이라면 돈을 많이 버는 삶이 행복할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이 행복에 주는 영향이 미미한 편이다. 대학교 내내 용돈을 스스로 벌어서 쓰다가 취직을 했을때, 월급이 들어오자 너무 기뻤다. 하지만 내가 쇼핑을 한 것은 불과 세 달에 불과하다. 세 달 쇼핑 하니까 더이상 소비로 만족을 못 얻기 시작했다. 내가 무언가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에서 얻는 만족감이 크다는 걸 취직하고 깨달았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광고를 보기 싫어하고 공해 취급을 하는데, 나는 광고를 만들기 위해 일주일에 하루 쉬면 감사해하면서 밤새 일하고 있는 것이 괴로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감독이 되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시기는 회사를 다녔던 3년이 전부다. 어렸을때 집이 그렇게 가난한 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나에게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셨고, 나는 고등학교에 가서야 첫 용돈을 받았다.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부모님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스스로 돈을 벌었고, 그런 점이 커리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광고회사에 들어가는 것도 반대하셨고,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반대하셨으나 나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부모님이 뭐라 하시든 말든 나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영화도 회사 다니면서 모아둔 돈으로 찍었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릴 지언정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았다. 3년 간의 풍요로움을 뒤로하고 사표를 낸 것이 쉬웠던 이유는 돈에 쪼달리는 생활에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영화계에 들어와서도 계속 쪼달리는 생활을 하고 너무 힘들었던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못해먹겠으니 영화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죽으면 가지고 가지도 못할 돈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좋은 차를 타면 좋겠지만 좋은 차를 탄다고 나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도 않다. 내 작품으로 인정받는게 포르쉐를 타서 인정받는 것보다 나에게 훨씬 큰 행복감을 줄 것이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겠다. 그렇다면, 재능은 있지만 경제적으로 궁색한 사람 과, 재능은 없지만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 중 누가 영화감독으로 성공할 확률이 클까? 칸에 가서 황금야자상을 받을 만큼의 성공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천재는 애초에 저런 질문이 무색하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진 않지만 계속 영화를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대다수의 감독이 될 확률을 말하는 것이다. 재능이 있어야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시려면 재능 없이 영화감독이 된 수많은 감독의 작품들부터 반박을 하시라. 누군가를 까려고 쓴 글이 아니기 때문에 예시는 들지 않겠다. 하지만 당신은 그런 영화들을 무수히 많이 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까 한다.
내 재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성격이 괴팍해서, 운이 없어서, 아직 때를 못 만나서, 마음 맞는 제작자를 못 만나서 등 다양한 이유는 들어봤지만 '재능이 없다'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나를 싫어하는 작가 한 분과 교수 한 분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미 그 사람들은 내가 각본가로 돈을 벌면 자신이 영화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안 지키고 계신 분들이니 차치하자. 나도 내 스스로의 재능을 의심하지 않는다. 천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나만의 색깔을 가진 영화를 만들어낸 능력이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다. 내가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하기 전에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한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친구가 워낙 특이해서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영화를 전공했다고 하는데 나와 영화 얘기를 하면 지식수준이 그렇게 깊지가 않아서였다. 영화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영화를 전공했는지 신기했다. 그것 만이라면 기억에 이렇게 오래는 안 남았을 텐데, 아버지가 세계적인 기업의 임원이었다. 그래서 돈에 대한 개념이 아예 달랐다. 도전에 대한 개념이 달랐다. '돈'을 생각하면 '벌어야 할 무언가', '저축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집에 있는 무언가'의 개념. '도전'을 생각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 '실패 후 다른 걸 하기엔 나이가'가 아니라 '실패하면 딴거 하지 뭐'의 개념. 그 친구보다 내가 훨씬 재능이 있었지만, 그 친구는 나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나는 1000대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인턴을 해가며 겨우 들어온 자리를 아버지 전화 한 통으로 들어온다. 나는 아직까지 차려보지 못한 제작사를 그 친구는 그냥 차린다. 나는 장편 영화를 찍고 각본가로 커리어를 쌓았지만, 그 친구는 영상 프로덕션을 차려서 오로지 아버지 인맥의 회사 홍보영상만 찍는다.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아버지 인맥으로 찍은 홍보영상을 가지고 다른 회사 홍보영상을 찍을 수 있었겠지만, 그 친구의 재능이 그정도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내가 영화감독으로 성공할 확률이 클까, 그 친구가 영화감독으로 성공할 확률이 클까?
이게 간단하게 대답할 질문이 아니라는 점을 어렴풋이 깨달으셨다면, 비슷한 경험이 있으시거나 영화계에 종사하고 계시겠지. 극소수의 예외 빼고 성공한 영화감독은 모두 잘 사는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시거나. 그 친구는 여전히 행복해보인다. 잊고 살다가 카톡 프로필 업데이트 란에 뜬 그 친구의 행복한 사진을 보면서, 양가감정이 들었다. 내가 그의 재능 없음을 불쌍하게 생각해야 할까, 그가 나의 열등한 경제력을 불쌍하게 생각해야 할까. 누가 더 불리한가. 누구의 삶이 더 행복한가. 이런 비교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보면 내가 많이 우울하긴 한가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나를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