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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며

by 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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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음악이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홍대 지하 공연장은 늘 눅눅한 공기로 가득했고 드럼 소리가 심장을 두드릴 때면 하루의 답답함이 단숨에 흩어졌다. 사람들은 헤비메탈을 두고 시끄럽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나에겐 숨을 터뜨릴 수 있는 해방구였다. 재즈를 좇던 때는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불규칙하게 흐르는 리듬에 마음을 맡겼다. 묘하게 자유를 닮아 있었고, 그 속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렇게 여러 길을 돌아다니다가 지금은 클래식 앞에 앉는다. 아이들과 블랙핑크 노래에 맞춰 뛰며 웃는 날도 있고 방탄소년단의 음악이 위로되어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 세워주기도 한다. 하지만 하루를 버텨내는 동안 집 안을 채우고 흩어진 생각을 붙잡는 건 결국 피아노 연주곡이다. 건반 위로 흘러내리는 소리가 방구석구석 번지면 마음이 하나둘 가라앉는다.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유난히 마음을 붙잡았다. 언제 처음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비가 오는 날이면 자꾸 그의 연주를 찾았고, 주안이를 임신했을 때는 거의 매일 틀어놓았다. 그 무렵은 첫 해외 생활이었다. 스와질란드, 지금은 에스와티니라고 불리는 나라에서 지냈는데, 아프리카의 유럽이라 불릴 만큼 조용하고 잔잔했지만 내겐 이상하게도 유배지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하나 없고, 하루가 길고 고요해서 더 외로웠다. 그럴 때 건반이 또르르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뱃속의 작은 움직임에 귀 기울였다. 아이가 반응하는 것 같아 혼자 웃기도 했고, 음악이 방 안을 채워주면 낯선 공기 속에서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때 한국에서 라흐마니노프 앨범을 선물로 받았는데, 두 손으로 조심스레 포장을 뜯던 순간의 설렘은 지금도 선명하다. 얇은 비닐을 벗겨내고 반짝이는 CD를 꺼내 들며 ‘이 음악을 아이와 함께 듣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의 벅참이 오래 마음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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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의 청춘은 오래전 러시아의 겨울 풍경과 함께 떠오른다. 길게 뻗은 자작나무 숲, 서늘한 공기, 그 속에서 어린 소년은 건반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순간마다 주변은 놀라움으로 가득했지만, 음악의 신동에게도 인생의 첫 무대는 잔혹했다. 스물네 살, 교향곡 1번이 세상에 나왔던 날. 악장이 끝날 때마다 들려야 할 박수 대신 차가운 정적이 공연장을 메웠다. 평론가들은 “지옥의 소음”이라는 말을 남겼고, 그 말은 화살처럼 가슴에 박혔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곡을 쓰지 못했다. 무대도 외면했다. 음악이 전부였던 사람이었기에, 그 침묵은 삶을 통째로 잃어버린 듯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깊은 바닥에서 뜻밖의 손길이 다가왔다. 니콜라이 달 박사. 그는 의사이자 최면치료사였는데, 매일같이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당신은 곧 훌륭한 교향곡을 쓰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하게 될 거예요.”


그 단순한 문장이 작은 불씨처럼 마음속에서 살아났다. 결국 그 불씨는 교향곡 2번으로 타올랐고, 무대 위에서 청중은 열광했다. 패배자의 이름은 다시 찬란하게 불렸다. 하지만 화려한 부활에도 그의 삶은 늘 고향을 잃은 자의 쓸쓸함으로 채워졌다. 혁명 뒤, 그는 러시아를 떠나 미국과 유럽을 떠돌았다. 작곡가라기보다 피아니스트로, 생활을 위해 무대에 서야 했지만, 건반을 두드릴 때마다 마음속에는 떠나온 강과 숲, 잃어버린 계절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한 인간의 고백처럼 다가온다.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선 사람, 그리고 끝내 고향을 품지 못한 망명자의 그리움. 그 모든 것이 그의 선율 속에 남아 있다.


나 또한 그 고백 같은 음악 앞에 앉는다. 삶이 시끄럽게 흘러가고 생각이 흩어질 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는 방 안을 채우며 어지럽던 마음을 가라앉힌다. 시간이 흘러도 라흐마니노프는 여전히 내 플레이리스트 속에 있다. 좋아요- 버튼은 변함없이 눌린 채 남아 있다.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피아노곡을 듣고 있으면 속 끓이던 것들이 가라앉고 마음이 다시 숨을 쉰다. 오래전 축축한 지하 공연장에서 드럼 소리에 몸을 맡기던 것처럼, 지금은 건반 위에서 흘러내리는 음표들이 하루의 무게를 풀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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