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말없는 남편과 살아가는 방법

기대를 버리자,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by 샐러드이모


그는 참 성실하다. 아침 출근 시간 저녁 퇴근 시간 칼같이 맞춰 밥을 챙겨먹는다. 이 얼마나 현대 사회에 보기 드문 성실함인가.


남편은 참 말이 없다. 아침에는 말 없이 밥을 먹고 출근하면서 “나 간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저녁 6시가 되기전 퇴근하면서는 아이들을 향해 “나 왔어” 한 마디 하고 들어온다. 밥이 되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남편은 핸드폰 게임을 하며 여전히 말없이 기다린다.


빨리 안 차린다고 난리치던 예전을 생각하면 아무말 없이 기다려주는 남편이 요즘은 감사할 따름이다.

숟가락 까지 다 놓고 밥을 다 차리면 그는 본격적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숏폼영상을 보며 밥을 먹기 시작한다. 물론 아이들도 나도 함께 한 자리에서 밥은 먹지만 남편은 오로지 핸드폰과 교감하며 밥을 먹고는 내가 먹기 시작할 때쯤엔 후식을 먹는다.


나는 남편과 아이들 밥을 차리고 미리 과일까지 준비해두느라 늘 먹는 시간이 늦는데다 오래 걸리는데 남편은 항상 가장 먼저 먹는데다 빨리 먹기에 밥 먹는 타이밍이 늘 엇갈린다. 그렇다 한들 한 자리에 있어도 오로지 눈과 귀가 핸드폰 세상속에 있는 사람과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심지어 내가 국이 간이 맞는지 반찬이 입에 맞는지 물어봐도 귀에 꽂은 이어폰 소리 때문에 내 말은 아예 듣지도 못한다.


그렇게 후식으로 과일과 과자와 아이스크림까지 차례대로 먹고 나서는 헬스를 간다고 나선다. 그때까지도 나는 밥을 먹는 중이고 그 와중에 아이들에게 책 읽고 공부하라고 당부를 해 놓고 간다. 아빠 올때까지 숙제 해놓으라는 말만 남기고 또 사라진다.


그는 저녁9시반쯤 되서 집에 다시 들어온다. 아이들은 내가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 동안 티비도 보고 저희들끼리 장난치고 놀다가 뒤늦게 숙제를 하느라 바쁘고 나는 집안일을 마무리하느라 지쳐있다.


아이들은 아빠가 오면 늘 잘 시간이 되었다는 걸 안다. 아이들은 눈치껏 부랴부랴 잘 준비를 하는데 자기 전에 책 한권 읽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작은 무드등만 키고 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나는 컨디션이 괜찮은 날엔 남편 몰래 읽어주지만 너무 피곤한 날엔 미안하다고 하고 아이들을 달래며 함께 잠들어버린다.


그런데 종종 해야할 집안일이 남았거나 혼자 좀 쉬고 싶은날엔 아이들만 방에 들여보낸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남편은 아이들이 늦게 자면 다음날 못 일어날까봐 얼른 자라며 이런 말을 한다.


“밤에 책은 무슨 책이야. 시간이 몇신데! 빨리 안 자면 몽둥이 들고 들어간다?”


나는 남편의 말에 화가 나지만 화를 내는 대신에 남편을 무시하는 쪽을 선택했다. 더 이상 남편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격렬히 싸운다한들 나와 아이들 모두 고통스러워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조용히 잠들면 남편은 저녁 먹을때처럼 곧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유투브를 보며 자신만의 세상에 빠진다. 나 또한 집안일을 하면서도 유투브를 보거나 숏폼을 즐겨보기도 한다. 생산적이지 않는 일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가끔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필요하기도 하다고 합리화해본다.


그렇게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낮에 못 봤던 컨텐츠들을 거의 멍 때리다시피 아무 생각없이 보곤 하는데 그러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그냥 지나간다. 남편은 종종 내가 핸드폰으로 뭔가를 집중해서 보거나 하고 있으면 뭘 하냐고 하면서 핸드폰을 홱 낚아채듯 들고 가 버린다. 그렇게 내 사진첩, 전화기록, 카톡, 앱쓰는걸 하나 하나 다 확인하고 나서 본인도 무안한지 나보고 “안 자나요?” 한 마디 하고는 슬그머니 침실로 들어간다.


의처증은 고칠 수 없다기에 그저 그러려니 포기하고 살지만 한번씩 내가 핸드폰을 보고 있을때마다 그러는 것은 매번 짜증이 나서 견딜수가 없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아이들에게 책 한권 읽어주지도 않으면서 책 읽는다고 혼내며 아예 책을 뺏어버리고, 빨리 안 자면 맞는다는 식으로 협박하는 것은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된다.


이제껏 남편을 이해해보려고 무던히 노력해봤지만 여전히 이해안가는 것들 투성이다. 무관심하려면 시종일관 끝까지 무관심하던지, 관심을 가지려면 처음부터 대화를 하던지 이도 저도 아닌 무관심과 통제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제 와서는 딱히 할말도 없어지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 집에 살고 있고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방에서 잠은 자도 우리가 가족이라는 느낌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들이 그나마 어린데도 이 정도인데 아이들이 크고 나면 얼마나 집이 썰렁해질까.


나이가 들수록 친구도 하나 둘 정리가 되고 인간관계에 회의감이 찾아올때가 있는데 가장 의지하고 살아야 할 가족간에도 마음 나눌 곳이 없다 생각하니 마음 한 켠에 외로움이 자꾸 커진다. 그럴때마다 오히려 잘 먹고 운동하고 좋은 유투브 강의를 들으며 (책은 도저히 못 읽겠고) 자기 계발에 취미를 가져보려한다.


한편 남편이 가진 성실함으로 이 가정을 유지시켜 주는것 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다시금 깨달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사람이 다 가질수는 없지. 나도 완벽한 존재가 아닌데 타인에게 완벽하길 기대해선 안되는거지. 남편은 지금 이 정도만이라도 충분히 자기 역할을 해내는 중이다. 더 이상 기대하지 말자. 나의 남은 생을 건강하게 보내기 위한 노력에 집중하며 살자.


그리고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잠은 푹 자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