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과 트랙터 옆을 지킨 시민의 일기
24절기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 한 해를 스물네 개의 구간으로 나눠 부른 것이다. 이를 농경 사회에서는 농사를 잘 짓기 위한 작기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현대에 와서는 한 해를 어림하기 위해 언급되고는 한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2~30대 젊은이들에게는 입춘, 입동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절기 개념은 낯설기만 하다. 이제 24절기를 서른 번 조금 못되게 돌아봤지만 누가 경칩(驚蟄)이라 하면 개구리가 잠에서 깨었겠거니, 처서(處暑)라 하면 옷을 두껍게 입어야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 내 인생에 태양의 위치를 뚜렷이 실감할 수 있었던 날이 바로 12월 21일, 2024년의 동짓날이었다.
▲ (오후 1:30) 트위터 (현 X)에 올라온 향연님의 트윗 SNS에 올라온 트랙터와 농민을 강제진압 하는 경찰 병력 ⓒ 향연 (@symposion_)
이날, 토요일 아침부터 업무 관련 행사가 있어 9시에 집을 나섰다. 나름의 격식 있는 자리인지라 평소 입던 롱패딩은 제쳐두고, 얇은 내의에 카디건 두 겹만 걸치고 집을 나섰다. 급한 일이 마무리된 점심쯤, 트위터(현 X)에서 트랙터를 끌고 상경하는 농민들의 앞길을 경찰이 막아섰다는 소식을 접했다. 멀리서나마 연대하기 위해 112에 경찰을 규탄하는 문자를 보내고 30분 정도 지났을까, 집회가 종료되어 정상 소통 중인 상황이라는 답장을 받았다. 마음을 놓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지난주까지 국회의사당을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는데 이번 주부터는 맛집도 많고 교통은 더욱 편리한 광화문으로 갈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경복궁역에서 남편과 만나 광화문으로 향하는 동안 수많은 깃발과 얼굴, 응원봉을 지나쳤다. 거대한 광화문을 가리는, 마찬가지로 거대한 전광판이 전국농민회총연맹의 하원오 의장을 비추고 있었다. 112의 답장과는 달리 경찰이 아직 트랙터를 막아서고 있다고 했다. 하원오 의장은 침착하게, 남태령으로 돌아가 트랙터를 몰고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향하겠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행보에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 (오후 4:00) 광화문 동십자각, 성균관대학교 민주동문회 깃발 24년 12월 21일, 광화문 동십자각 앞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파면·처벌 사회대개혁! 범국민 대행진 행사 ⓒ 마고
계엄 선포 이후 광장에서 만난 반가운 인연이 있다. 바로 나와 내 애인이 졸업한 성균관대학교의 민주동문회 선배들이다. 8~90년대에 민주화 운동을 한 선배들과는 나이 차이가 꽤 나지만, 같은 깃발 아래 서 있으면 세대를 넘은 연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이날 6시에는 민주동문회의 송년회 겸 총회가 있었는데 얼굴 본 지 몇 번 안 된 우리들도 기꺼이 초대해 주셨다.
경복궁역에서 창덕궁 사거리까지 도로를 빼곡하게 메운 시민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혜화로 향했다. 총회는 성균관대학교 정문 옆, 유림회관에서 진행됐다. 식이 진행되는 중 '청년 심산상'을 받기로 했던 선배분께서 현재 트랙터를 끌고 상경하는 과정에서 경찰에 발이 묶여 오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녁 7시였다.
총회의 식순은 소리사랑이라는 노래패의 공연으로 마무리되었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김광석의 <광야에서>, 이번 집회에서 많이 들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 뿐 아니라 여러 민중가요를 공연하셨는데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크게 흔든 노래는 <동지가> 였다. 총회에 참석한 50명 남짓한 동문께서 일제히 주먹 쥔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동지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함께 보냈을 대학 시절, 함께 외쳤을 개혁의 그림을 그려보았다. 총회에서 나눠준 민주열사 추모 책자의 수많은 이름을 마음에 써보았다. 떠나간 동지들을 기억하며 남은 동지들은 함께 <동지가>를 불렀다. 그들을 보며 2024년의 대한민국도 언젠가는 어둠을 헤치고 빛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바랐다.
총회가 끝난 뒤 벅찬 가슴을 끌어안고 혜화역으로 향했다. 토요일 저녁의 4호선은 우리를 쉽게 집으로 보내주지 않았다. 한참을 오지 않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켰다. 그때 시간 11시 10분, 아직도 경찰차가 남태령에서 농민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남태령으로 가는 마지막 지하철이 들어왔다. 피곤하지만 당연히 가야한다 생각했고, 이때까지만 해도 마음 한편으로는 2시쯤에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 24년 12월 21일, 남태령 남태령역 3번 출구 인근, 농민과 트랙터를 막아선 경찰차 ⓒ 마고
남태령역 3번 출구 앞은 썰렁했다. 5분 정도 고개를 걸어 올라가니 경찰차 벽이 있었다. 경찰 버스가 차도를 가로로 막고 있었다. 서울로 향하는 관목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 마치 나라 전체를 가로로 꿰뚫은 못과 같았다. 이와 반대로 트랙터는 정방향으로, 서울의 중심을 뚜렷이 바라보고 있었다. 경찰차와 트랙터가 마치 테트리스 블록처럼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시민들이 있었다. 내가 근 2주간 봐왔던, 들어왔던 표정들과 목소리들이 그곳에도 있었다. 국회, 광화문 광장과 마찬가지로 모인 사람 중 80% 정도가 내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두꺼운 패딩 위에 담요를 한 번 더 걸치고 목도리를 머리까지 둘러 무장했지만 그들의 눈빛만은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차 벽 바로 아래서 몇몇 시민들이 경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 빼라!"고 소리쳤다.
커다란 카메라는 MBC와 YTN의 것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최근 집회에서 항상 수많은 카메라를 마주했기에 그런지 오히려 언론이 몇 안 보이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핸드폰 거치대와, 원래는 거치대가 아니었을 장대에 매달린 핸드폰이 언론을 대신하고 있었다.
30분 정도 트랙터 바퀴 옆에 서서 구호를 외치다가 문득 '아, 오늘 집에 못 들어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가방 속에는 우연히, 혹은 필연히 광화문 광장에서 받았던 접이식 방석이 들어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앞쪽에 앉은 시민분께서 포장용 뾱뾱이를 건네주셨다. 차마 패딩으로 덮지 못한 다리 위에 에어캡을 덮고, 그 아래로 남편과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 추운 겨울을 무던히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 24년 12월 21일, 남태령역 3번 출구 인근 농민과 트랙터 곁을 지키고 선 시민들 ⓒ 마고
트럭 위로 광화문과 비교해 봤을 때 굉장히 허술한 발언대가 세워졌다. 그 앞에 서기 위해 많은 분들이 트럭을 오르내렸다. 1,000여명 정도 되는 시민들은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농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옆 사람과 대화하며 자정을 넘겼다.
1시 반쯤 되었을까 갑자기 경찰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일제히 환호하며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춥고 까만 밤, 영하 7도의 서늘한 바람이 남태령 고개를 쓸어내리는 밤, 드디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구나. 천천히 질서 있게 나아가는 중에 경찰이 농민을 끌어내리기 위해 유리창을 부순 트랙터를 지나쳤다. 서로서로 유리 조심하라며 뒷사람의 발 언저리를 살폈다. 승리를 축하하는 노래 서너 곡을 부르며 걸어 내려왔을 때, 농민분께서 다시 발언대에 올랐다. '경찰이 남태령역에서는 차를 뺐지만 사당역에 2중, 3중으로 차 벽을 세웠다'는 소식을 전했다.
우리는 다시 냉골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차를 빼는 듯하더니 다시 앞길을 막고 뒤쪽, 과천으로도 차 벽을 세워 우리를 가둔 경찰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한동안 우리의 구호는 일정 크기 이상으로 커지지 못했다. 남태령 고개에는 편의점도, 음식점도, 고층 아파트 불빛도 없이 가로등, 높은 시멘트벽과 스산한 나무들뿐이었다. 대신 우리에게는 목은 쉬었지만 재치있는 사회자와 바람을 막듯 거대하게 뿌리내린 흙 묻은 트랙터, 그리고 마스크와 담요로 무장해 서로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단단한 시민·농민 연대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있어 버틸 수 있었다.
▲ 24년 12월 21일, 남태령에 배달된 따뜻한 커피 남태령역 3번 출구 인근으로 배달된 수많은 음식과 음료 ⓒ 마고
그 순간 홀연히 어묵 차가 등장했다. 피자 30판과 뜨거운 음료, 죽과 고기국수, 국밥, 김밥이 나타났다. 앞뒤로 경찰이 꽉꽉 막고 있는 이 경사진 고개에 음식이 자연 발생한 것처럼 생겨났다. 경찰차에 막혀 가까이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보온 버스도 도착했다. 새벽 3시의 일이었다. 시민들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에게 따뜻한 음식과 핫팩, 간식, 건전지를 나눠주며 돌아다녔다. 활기찬 목소리로 자유 발언을 하고 새로운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그 누구도 동짓날 새벽, 차디찬 차도에서 새벽을 보내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얇게 입고 오거나 핸드폰 배터리가 없는, 준비가 안 된 시민들도 많았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수많은 시민이 뜻을 보내 그 자리를 채워주셨다. 음식과 담요를 옆에서 옆으로 넘겼다. 모두 춥고 힘들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추워 보이는 사람에게 양보하느라 물자 배부 속도가 오히려 더뎠다.
새벽 5시, 남태령역으로 조금 더 걸어갔다. 그래봤자 5분 정도 걸었을 뿐이다. 전날 밤 11시부터 출발해 6시간 동안 500m도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 지하철의 문이 열렸다. 굳은 몸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바람, 쾌적한 화장실이 열렸다. 그리고 또 첫차 타고 이곳으로 와줄, 오리라 약속했던 수많은 시민의 길이 열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침 8시까지는 기다려보자고, 새로 이곳으로 올 사람들과 눈 맞추고 들어가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동지가>가 흘러나왔다.
휘몰아치는 거센바람에도
부딪혀오는 거센 억압에도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보았다
살을 에는 밤 고통받는 밤
차디찬 새벽서리 맞으며 우린 맞섰다
사랑~ 영원한 사랑 변치않을 동지여
사랑~ 영원한 사랑 너는 나의 동지
남태령에 모인 시민 대다수가 단체를 통해 조직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곳에는 정말 무한히도 다양한 정체성이 함께 할 수 있었다. 농민, 그리고 농민과 연대하는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자, 그리고 내가 미처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소수자와 약자가 함께 했다. 도시와 농촌을 첨예하게 나누는, 권력을 가장한 폭력을 뚜렷하게 인지하고 짚어낼 수 있는 소수자들이 한곳에 모였다. 우리는 가장 평화적으로 하지만 분명하게 우리가 이 자리에 있노라고,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는 또 다른 소수자를 도울 것이며 우리는 진보할 것이라고 외쳤다. 더 이상 동문 선배들의 연대가 부럽지 않았다. 나의 세대에게도 동지가 있었다. 비록 마스크와 패딩으로 중무장해 서로의 얼굴은 제대로 알 수 없어도, 이 자리를 벗어나면 길에서 지나쳐도 그들을 구분할 수 없을지라도. 나에게는 24년 동지 밤을 같이 지새운 동지가 있다. 이 기억으로 나는 평생을 살 것이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한다. 오전 5시부터 해가 뜨는 7시 반이 되기를 기다린 2시간가량이 전날 밤부터 오전 5시까지의 6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익숙하지 않은 철야에 눈꺼풀이 감기고 차갑게 식은 발 핫팩이 발바닥을 찌르고 손가락은 굽었다. 사당역을 바라보는 방향에 놓인 얕다란 언덕 정상에서 남색 빛이 올라오다 말고 멈칫거렸다.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으니 자리에 앉아있어도 될 텐데 다들 추위를 쫓으려 일어나 서성였다. 아무리 찬바람이 스며들어도 지하철은 그나마 따뜻해서 구석구석 잠든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또, 아무리 잠이 와도 차도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담요를 두겹 세겹 두르고 차도 변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시민들도 있었다. 두려웠다.
▲ 24년 12월 21일, 남태령에서 새벽을 지샌 시민들 영하 7도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도로를 지킨 시민들 ⓒ 마고
어떻게 영하 7도의 날씨에 1,000명 가까이 되는, 그것도 한없이 젊거나 나이 든 소수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집단을 이렇게 고립시킬 수 있지? 남태령의 아침 6시, 해가 뜨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나는 이태원과 세월호를 생각했다. 얼마나 추웠을까. 왜 우리는 추워야만 하는 걸까. 아침이 오면 끝나긴 하는 걸까. 경찰이 차를 빼지 않는다면 이 짓을 며칠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 나야 집에 다녀오면 된다고 쳐도 서울이 고향이 아닌 농민들은 어떻게 하지.
6일 동안 운전해서 몰고 온 트랙터가 서울 땅을 밟지도 못하고 내려가게 할 수는 없었다. 절망에 무릎 꿇으면 그들을, 그리고 우리들을 지킬 수 없다는 생각에 힘입어 트럭 앞쪽으로 가 뭐라도 먹을 게 있는지 물어봤다. 피자나 김밥같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은 다 나갔고 국밥 몇 그릇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딱 한 그릇의 팥죽이 남아있었다. 아주 어릴 적 빼고는 동짓날에 팥죽을 찾아 먹지 않아서 처음에는 손에 쥐어진 플라스틱 죽 그릇이 낯설기만 했다. 날이 너무 추워 금방 식어버렸지만 얼어버린 내 손보다는 따뜻해 미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한 여성분께서 이거라도 꼭 드시라며 쥐여준 플라스틱 숟가락을 어색하게 들고 행렬로 돌아왔다.
▲ 24년 12월 21일, 남태령에서 먹은 팥죽 남태령 3번 출구 인근, 농민의 트랙터 시위와 현장의 시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배달 음식을 보내준 시민들 ⓒ 마고
뚜껑을 열어보니 까아만 눈이 쌓인 것 같이 보였다. 차가운 바람을 맞아 죽이 금방 차가워졌지만 입 안에 들어가니 사르르 녹았다. 생각보다 달지 않고 목 넘김이 좋았다. 새알 한 알은 반을 쪼개어 나눠 먹었다. 이 시간에, 차도에서, 팔자에도 없던 팥죽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동짓날에 팥죽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했다. 24년의 동지를 넘긴 새벽 6시, 팥죽을 꼭꼭 씹어 먹으며 나는 한 살 더 먹은 것 같았다. 아니, 그때의 기분으로는 백 살은 더 먹은 것 같았다.
해가 떠오를 때는 다 같이 <둥근 해가 떴습니다>를 불렀다. 따듯한 붉은빛이 한기가 도는 남색 하늘을 집어삼켰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지하철역에서 하나둘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저들은 어떻게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남태령으로 올 수 있었을까. 아마도 밤새 남태령의 소식을 찾아보며 잠 못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수많은 시민을 잠 못 들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추운 겨울,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이제는 조금 쉬려 했던 트랙터의 시동을 걸게 한 자는 또 누구인가. 농민들과 시민들이 하나 되어 서로의 동지가 되게 한 자 누구인가.
▲ 24년 12월 21일, 남태령 3번 출구 인근 농민 트랙터 윤석열 즉각 파면·처벌! 사회대개혁! 범국민 대행진 행사를 위해 트랙터를 끌고 상경한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 ⓒ 마고
대열 뒤쪽으로 7줄 정도 더 늘어났을 때가 오전 8시쯤이었다. 우리는 앞쪽의 트랙터와 경찰차 벽을 두 눈에 똑똑히 담아내고는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아직 많은 이들이 도착하지 않아 지금 가도 되는가, 우리가 떠나면 남은 농민들은 어떡하지,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에스컬레이터를 탔는데 반대쪽에서 "수고하셨습니다!" 소리가 들려왔다. 남태령역 2번 출구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동지들이 빼곡히 올라오고 있었다.
남태령역에서 집까지는 1시간 정도. 여기서 자면 종점까지 가버릴 게 분명해 눈 부릅뜨고 인터넷에서 남태령 소식을 찾아보았다. 밤새 핸드폰 배터리 1%로 버텼는데, 시민들이 보내주신 보조 배터리로 새벽에야 겨우 핸드폰을 충전했다. 핸드폰도 못 보고 9시간 동안 차 벽 사이 고립되어 있어서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남태령을 주목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태양의 부활이 아득하게만 느껴졌었다. 밤새 인터넷에 올라온 수많은 단체, 그리고 개인들의 연대를 확인하자니 1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끊임없이 감사의 마음과 연대의 문장이 밀려 들어왔다. 과연, 동지는 태양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맞았다.
집에 도착해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딱 5시간 뒤로 알람을 맞췄다. 자고 일어났을 때 아직도 경찰이 농민들을 막아서고 있으면 남태령으로 돌아가기 위해 입었던 옷과 핫팩이 들어있는 가방을 정리하지 않고 한쪽에 내려놓았다. 다행히 남태령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찰이 29시간 만에 차 벽을 열었고 농민들과 시민들은 한강진역으로 향했다. 트랙터가 정말 그곳에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 있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만 일해본 작자의 집 앞으로 그가 외면해 왔던 농민이, 그리고 모든 존재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농민의, 시민의, 국민의 승리였다. 경찰은 결국엔 차를 빼야 했고, 대통령은 결국엔 방을 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농민이 발걸음해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울 것이다.
우리의 아스팔트 농사는 성공할 것이다.
예로부터 동짓날이 추우면 다음 해에 풍년이 든다는 믿음이 있다. 한 해의 가장 어둡고 추운 날, 동지(冬至)를 지켜낸 동지(同志)들이 있었기 때문에 25년은 더 푸르고 더 풍성할 것이다.
*기록 영상
https://youtu.be/YcOVCzrCQtI?si=xp_PkuVhSJeYE-Bc
#남태령 #트랙터시위 #농민 #전농 #전여농 #전봉준투쟁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