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이 없는 사람의 틈 이야기
안녕하세요, 온틈 에디터 오세훈입니다. 저는 그동안 온틈이 이야기하는 ‘틈’의 가치를 글로 정리해왔는데요, 그 과정에서 ‘틈’이라는 단어가 다양한 모습을 품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건물 사이의 균열일, 다른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여유일 그 다채로운 의미의 결을 찾아,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들의 내면을 먼저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그 첫 번째 기록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틈’이 없어 보이는 디자이너 나은 님의 이야기입니다.
나은 님은 고객 분들의 마음속에 온틈의 세계를 그려 넣는 디자이너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단단한 논리와 따스한 감성이라는 양가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저는 두 모습 사이의 간극이 늘 궁금했습니다. 나은 님의 세계에서, 틈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요.
# 스스로를 통제하는 삶
세훈: 첫 질문이니까, 가볍게 시작해볼까요? 퇴근하고 집에 가면 가장 먼저 뭘 하세요?
나은: (웃음) 제 루틴은 단순해요.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손을 씻고 ‘화이트리에’ 식빵부터 입에 물어요. ‘식빵계의 에르메스’라고 불릴 만큼 유명한데, 전 우연히 집 근처에 있는 흰색 가게가 마음에 들어 들어갔다가 알게 됐죠.
세훈: 평범한 루틴인데요? 의외예요. 혹시 출퇴근길에는 ‘딴짓’ 같은 걸 하시나요?
나은: 아, 전 딴짓 안 해요. 딴짓하는 저를 통제하죠.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을 보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해서, 영어 공부 관련 외국인 계정만 팔로우하는 부계정을 따로 만들었어요. 저도 모르게 ‘김종국이 결혼했네’ 같은 이슈가 보고 싶어질 때마다 바로 계정을 전환해서 영어 공부 피드를 보는 거죠. 정말 이 브랜드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죠? (웃음)
세훈: (놀람) 그럼 휴식 시간이 아예 없는 건가요?
나은: 네, 최대한 쉬지 않아요. 타인에 의해, 예를 들어 친구나 가족이 찾아올 때처럼 쉬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요. 밥 먹을 때도 책을 보거나 영어 공부를 하고… 음, 예전엔 샤워할 때도 지퍼백에 공부할 걸 넣어두고 볼 정도였어요.
세훈: 번아웃은 없었나요?
나은: 물론 있었죠. 그럴 때는 그냥 잠만 자요. 먹지도 않고. 1~2주 정도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자고 나면 괜찮아지더라고요. 더 이상 잠이 안 오기도 하고. (웃음)
# 그럼에도 휴식, 여행과 예술
세훈: 그렇게 일상을 완벽하게 통제하신다면, 여행은 어떻게 즐기세요?
나은: 여행은 온전한 휴식을 위해 가요. 일상과는 완벽히 정반대죠.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조용한 소도시로 가서 숙소에 오래 머물러요. 최근에는 나고야, 삿포로,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같은 곳에 다녀왔는데, 나고야에 갔을 때는 나고야성 같은 유명한 관광지 대신 조용한 주택가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일상과 완전히 단절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 같아요.
세훈: 그럼 여행을 제외하고 ‘OFF’ 모드로 들어가기 위해 찾는 예술 작품이 있나요? 있다면 이유도 같이 말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나은: 음… 그런 게 따로 있지는 않지만,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있어요. 영화 <아가씨>인데, 제 인생 영화이자 유일하게 별점 5점을 준 작품이에요. 제가 ‘쓰레기’라는 존재, ‘이질적인 조합’에 큰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영화 <아가씨>가 그런 면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고요. 보이는 건 아름답지만, 실제로 그 속은 엄청 흉한? 그 이질감이요. 어쩌면 제가 살아온 환경과 관련이 있는 것도 같아요. 저는 시골 출신이어서, 혼자 힘으로 대학에 진학했는데,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랑 정반대였거든요. 제 인생 자체가 이질적인 조합의 연속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업무 중에 <아가씨>의 OST가 아니라, 배우들의 대사나 숨소리가 담긴 녹음 사운드를 틀어놓기도 해요. 좀 이상한가? (웃음)
# 흰 것과 희끄무레한 것, 그리고 ‘틈’
세훈: 이 인터뷰도 흥미로운 조합의 연속인 것 같아요. 그럼 마지막으로, 나은 님이 생각하는 ‘틈’이란 무엇인가요?
나은: 솔직히 ‘틈’ 하면 이제 ‘온틈’밖에 떠오르지 않지만(웃음), 굳이 정의하자면 ‘성취감’인 것 같아요. 제가 세운 인생의 목표를 달성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 저에게는 가장 큰 휴식이고 행복이거든요.
세훈: 그럼 혹시 최근에 필요가 아닌, 순수한 욕구만으로 무언가를 사본 적이 있나요?
나은: 대부분 필요나, 사회생활을 위한 도구로서 소비해요. 재미있는 게 있다면, 제 몸은 깔끔하고 완벽한 ‘흰색’에 익숙한데, 제 정신은 낡고 얼룩진 ‘희끄무레한 것’을 선망하는 것 같아요. 흰색이 구김 하나 없는 새 옷 같다면, 희끄무레한 건 해진 천에 여러 얼룩이 묻어있는 모습이죠.
세훈: 어쩌면, 그 둘 사이의 ‘차이’가 나은 님의 진짜 ‘틈’ 아닐까요?
나은: (웃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예전에는 제가 이런 걸 좋아한다는 생각조차 못 했거든요. 저 자신을 정말 잘 몰라요. 그런데 졸업 전시를 준비하면서 핀터레스트에 모아온 이미지들을 보니, 제가 너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것들을 전부 담아놨더라고요. 그걸 보고 처음 알았어요. 그런 이미지를 볼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보면, 아직 선뜻 다가가지는 못해도 제 마음이 그쪽을 향하고 있는 거겠죠.
스스로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삶인 흰색과, 정돈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인 희끄무레함. 나은 님과의 대화는 ‘틈’ 없이 단단해 보이는 한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가장 선명한 균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가장 깊은 ‘틈’은, 그 균열 사이로 미처 몰랐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그 경이로운 순간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떤 ‘틈’ 사이에서 새로운 당신을 발견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