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틈을 만드는 사람들 ep.4

나른한 파도 뒤에 숨겨진 단단한 결심

by ontm

안녕하세요, 온틈 에디터 오세훈입니다. ‘나른하다’라는 단어는 종종 게으름의 유의어처럼 쓰이곤 합니다. 하지만 뜨거운 오후의 햇살이나, 느리게 부서지는 파도를 볼 때 우리가 느끼는 나른함은 무기력이 아닌, 평화로움에 가깝습니다.


온틈의 네 번째 인터뷰는, 제주라는 섬이 가진 특유의 나른함을 품고 서울의 빌딩 숲을 유영하는 매니저, 민지 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나는 취향이 뚜렷하지 않다”라고 말하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그녀는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무엇이 편안한지, 무엇이 맞지 않는지를 정확히 알고 쳐낼 줄 아는 단단함을 지닌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른한 표정 뒤에 숨겨진 그녀의 명쾌한 결단력, 그리고 일상의 환기를 위한 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 나를 돌보는 가장 쉬운 방법, 환기


세훈: 반갑습니다. 먼저 일상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게요. 보통 집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시나요?

민지: 현관문을 열자마자 겉옷을 벗고 손부터 씻어요. 그러고 나면 바로 저녁을 챙겨 먹는데요, 보통 거창한 요리를 하는 대신 반찬 몇 가지와 햇반으로 가볍게 먹는 편이에요. 퇴근길에 지나치는 역 근처에 반찬 가게가 있는데, 종종 들러서 반찬을 사두거든요. 너무 평범한 일상인 걸까요?


세훈: (웃음) 그 평범함이 사실 제일 편안한 루틴이 아닐까요? 그럼 식사 후에는 어떻게 휴식을 취하시나요? 민지 님만의 ‘멍 때리는’ 방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민지: 침대와 이불만 있다면, 어디든 휴식이죠, 뭐. (웃음) 주로 유튜브를 보는데, 분명 요리를 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사실 요리하는 콘텐츠는 자주 봐요. 요즘은 <냉장고를 부탁해>에 꽂혀 있고요. 정작 저는 부엌도 좁고 입이 짧아서 요리를 잘 안 하는데, 신기한 식재료로 남이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는 게 힐링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잡생각도 많은 편이라, 멍하니 있고 싶을 때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요. 새벽 공기나 숲 냄새 같은 자연의 향을 좋아하는데,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면 복잡했던 머릿속도 같이 환기되는 기분이에요.


세훈: 그렇군요. 그럼 요즈음 유튜브 말고 꽂힌 콘텐츠는 따로 있을까요?

민지: 음… 아예 다른 범주기는 한데,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자주 봐요. 둘 다 어릴 때부터 자주 봤던 것 같아요. 특별한 계기도 없고. 출퇴근 길에는 늘 사회나 국제 면의 기사를 읽고, 퇴근 뒤나 주말에는 역사나 과학 분야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어떻게 보면 감정 소모 없는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걸 좋아한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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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춰야 할 때를 아는 용기


세훈: 제주도가 고향이시잖아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서울에서의 삶과 제주의 삶은 많은 점에서 다를 것 같아요.

민지: 확실히 다르죠.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속도가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제주도에는 특유의 나른함이 있어요. 사람들도 성격이 급하지 않고, 풍경도 여유롭고요. 저도 그 분위기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치열하게 경쟁하기보다는 나른한 사람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반면 서울은 가만히 있어도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요. 처음 서울에 왔을 땐, 너무 복잡하고 신경 쓸 것도 많아서 두통약을 달고 살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그 나른함이 너무 편안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될까 봐 서울에 남기로 선택했어요. 서울의 활기찬 분위기가 저를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 되기도 하거든요.


세훈: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대단하시네요. 그럼 그 동력이 도움이 되었던 경험도 있었을까요?

민지: 음… 직무를 전환할 때, 그 동력 덕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마케터에서 매니저로 길을 바꿨거든요. 먼저 마케터로 일할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계속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저와 맞지 않다는 걸 느꼈어요. 그리고 그 와중에, 제가 안정적인 시스템을 운영하고 체계를 만들어가는 걸 더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발견했고요. 그렇게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단 걸 알게 되었을 때, 우울해하고만 있을 순 없어서 매니저로 직무를 전환했어요.

사실 많은 분들이 쌓아온 커리어가 아까워서, 혹은 매몰 비용 때문에 맞지 않는 옷을 계속 입고 계시잖아요. 하지만 저는 “이건 아니다” 싶은 판단이 서면 방향을 트는 게 오히려 시간을 아끼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일해야 하는데, 그저 버티기만 하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잖아요. 내가 이 일을 했을 때 마음이 편안한가, 그리고 내가 이 분야에서 더 깊이 성장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아니요’라는 답이 나오면 과감하게 멈출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 틈, 마음의 창문을 여는 시간


세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온틈 이야기로 넘어와서, 민지 님이 생각하는 틈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온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민지: 저는 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비어있는 시간이나 공간을 뜻하는 단어 정도? 하지만 요즘은 환기의 의미로 다가오고 있어요. 꽉 막힌 방에 창문을 열어 새로운 공기를 들이는 것처럼, 빡빡한 일상 속에 잠시 멈춰 서서 마음을 환기시키는 그 모든 순간이 틈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맥락에서 온틈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래서 가능성이 많은 브랜드라고 생각해요. 마음을 환기시키는 그 모든 순간이 틈이듯, 그 틈을 제품으로, 콘텐츠로, 대화로 전달할 수 있는 게 우리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이니까요. 멤버들이 각자의 틈을 차분히 그려 나가고, 그 모든 가능성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우리 또한 온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훈: 마지막으로, 일상에 지친 독자들에게 민지 님만의 틈을 만드는 방법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민지: 거창한 여행이나 휴가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제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공릉 철길이거든요. 그냥 집 근처에 있는, 나무가 있고 걷기 좋은 길이에요. 생각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복잡할 때, 이런 소소하지만 탁 트인 공간에서 잠시 걸어보세요.

아니면 저처럼 카페인이 없는 차 한 잔을 마시며 좋아하는 향기를 맡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중요한 건 내가 좋아하는 감각에 집중하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환기시키는 거예요. 창문을 열면 새로운 바람이 들어오듯, 아주 잠깐의 틈만 있어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생길 거예요.




민지 님과의 대화는 마치 늦은 오후, 창문을 열어두고 맞는 선선한 바람 같았습니다. 제주 바다의 나른함을 닮았지만, 파도가 칠 때를 정확히 아는 단단함. 그녀는 그 단단함으로 말합니다. 맞지 않는 것에 매달려 자신을 소진하기보다, 과감하게 멈추고 창문을 열어 환기하라고요.


오늘 당신의 하루에는 새로운 공기가 드나들 틈이 있었나요? 혹시 지금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창문을 활짝 열어보세요. 그 찰나의 환기가 당신을 다시 숨 쉬게 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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