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이란, 서로가 맞물릴 수 있는 여백
안녕하세요, 온틈 에디터 오세훈입니다. 우리는 종종 완벽한 계획과 통제 속에서 안정감을 느낍니다. 분 단위로 쪼갠 스케줄, 타인에 대한 세심한 분석, 그리고 내일의 계획까지. 빈틈없는 삶을 완벽함이라 믿으며, 스스로를 촘촘하게 옭아맵니다. 하지만 정말 완벽한 삶에는 '빈틈'이 없는 걸까요?
온틈의 세 번째 인터뷰는, 스스로를 통제하는 촘촘한 삶을 살다가, 인생의 큰 굴곡을 지나며 '빈틈'의 가치를 받아들이게 된 마케터 정현 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이제 ‘틈’이란 "서로가 맞물릴 수 있는 매듭"과 같다고 말합니다. 촘촘했던 그녀의 세계가 어떻게 느슨한 '틈'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그 솔직한 고백을 들어봅니다.
# 집착, 그리고 기록
세훈: 첫 질문은 루틴으로 시작해 볼까요? 업무를 시작하기 전의 루틴 같은 게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정현: 아, 루틴이요. 저는 슬랙 '나에게 보내는 DM'에 매주 뭘 할지를 미리 적어놔요. 오늘 뭘 해야겠다, 이런 걸 적어놓는 게 루틴이죠. 사실... 저는 거의 모든 걸 기록한다고 보시면 돼요. 하루하루, 매일 분 단위로 기록해요. 회사에서 계획대로 안 되면 그것도 다 일단 기록을 해요. '왜 안 됐는지', '다음엔 어떻게 할지'에 대한 것들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예요. 머릿속에 계속 기억하고 있는 거죠.
세훈: 분 단위로요? 그렇게 촘촘하게 기록하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정현: (웃음) 2020년쯤이었나. 유튜브를 보다가 어떤 자기개발 유튜버 영상을 봤어요. 그분이 구글 캘린더를 시간 단위로 짜고, 이룬 건 빨간색으로 다시 기록을 남긴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김승호, 캘리최 님 같은 사업가분들도 좋아하는데, 그분들이 시간 관리법 이야기하는 걸 보고 '아, 나도 해야겠다' 싶었죠. 저는 실행력이 좀 강한 편이라, 그런 롤모델을 보면 바로 따라 해요.
세훈: 실행력이 강한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요. (웃음) 예전부터 그렇게 통제성이 강한 편이셨어요?
정현: 아... 사실 예전엔 지금보다 훨씬 심했어요. 2023년, 그 변화의 기점 전까지는... 통제성이 정말 강했어요. 제가 대학 입학 전부터 '1학년 1학기 때 뭐 하고, 2학기 때 뭐 한다' 이런 거시적인 계획을 다 세워뒀었어요. 그리고 제가 만든 동아리가 있었는데, 부원들을 한 명 한 명 다 분석했죠. 면접 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이 사람은 어떤 대화를 좋아할지 대화 리스트를 미리 짜보고... 나눴던 대화나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던 정보들을 메모장에 다 적었어요. 그리고 그걸 다 기억했죠. 그 사람이 스쳐 지나가듯 '나 이거 좋아해'라고 했던 걸 기억했다가 선물로 주면, 엄청 감동받고 그랬었어요. 인간관계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고, 제가 만든 동아리 환경은 특히나 더 제가 통제해야 한다고 느끼기도 했던 것 같아요.
# 통제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법
세훈: 그럼 그렇게까지 심했던 통제성을 놓아주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정현: 그게... 2023년에 제가 막 해외 생활도 길게 하고, 혼자 오래 지내고, 여러 일들이 있으면서...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크게 느꼈거든요. 사실 그전 2학년 2학기 때 처음 휴학을 했는데, 그때가 첫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그때 동기들은 아무도 휴학을 안 했어요. 인턴을 하려고 휴학한 것도 아니고, 보통 2학기엔 휴학을 잘 안 하니까요. 저는 그때 글을 쓰고 싶어서 휴학을 한 거였어요. 그래서 일부러 사람도 안 만나고 의도적으로 고립된 환경을 만들었죠. 그런데 갑자기 집안 사정이 안 좋아져서... 눈 떠보니까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알바만 하고 있는 거예요. (한숨) '내가 이러려고 휴학한 게 아닌데.' 그때 되게 '우울하다'는 감정을 느꼈어요.
세훈: 계획이 완전히 틀어진 거네요. 그 시기를 어떻게 버티셨어요?
정현: 버틴다기보다... 그냥 살았어요. 그러다 '이게 왜 그럴까' 분석하고 싶어져서, (웃음) '우울'이랑 '뇌'에 관련한 책을 좀 많이 읽었어요. '우울할 땐 뇌과학'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을 읽고 그 시기를 바로 이겨냈던 것 같아요. 그때 확실히 느꼈어요. 타인도, 상황도 내가 통제할 수 없구나. 그러면 그냥 받아들이자. 그리고 나 자신을 통제하는 데에 있어서도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 뭐든 받아들이자. 그렇게 됐죠.
# 틈이란, 서로가 맞물릴 수 있는 여백
세훈: 그런 경험이 '틈'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영향을 줬을 것 같아요. 그 이전시기에는 '틈'을 용납하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정현: 맞아요. 그래서인지, 저는 '틈'이...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틈이 있어야 서로 공생하고 상생할 수 있거든요. 우리가 사람을 볼 때 '빈틈이 보인다'라고 하잖아요. 저는 그 빈틈을 일부러라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빈틈없어 보이는 사람은, 남들이 봤을 때 관계를 깊게 만들거나 끈끈하게 엮어 나가기 어렵다고 느껴질 수 있잖아요. 서로의 틈이, 그 빈틈이 맞물려서... 뭐랄까, 어떤 매듭처럼 엮여 나가는 게 인간관계 아닐까요? 빈틈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들어갈 공간이 생기는 거니까요.
세훈: 그런데 아이러니하네요. 사람 사이의 '빈틈'은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정작 본인은 '시간적인 틈'은 못 견디시는 것 같아요. 혹시 '멍 때리기' 같은 것도 하시나요?
정현: 저는 한 번도 멍을 때려본 적이 없어요. 아무 생각 없이 있으려고 해도, 생각이 항상 머릿속에 있어요. (세훈: 저도 그래요. 머리가 안 쉬죠.)
그렇죠? 머리는 쉬지 않았잖아요. 전 그것도 뭔가 '한 거'라고 생각해요. 늘 무언가를 하고 있으니, 시간은 비어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만약 무언가 계획되어 있지 않은 시간이 있다면, 저는 그 '시간의 틈'을 가치 있는 것들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대신, 막 급한 일이 아니라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들로요. 예를 들면 나의 사고를 깊이 있게 만들어 줄 독서 같은 거? 아니면 아예 명상을 해요. 명상 가이드를 들으면서 타인의 도움으로 머리를 비울 수 있게끔요.
세훈: 그런 정현 님이 생각하는 ‘온틈’이란, 어떤 브랜드인가요?
정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순간을, 붙잡아두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아까 말한 것처럼 미친 듯이 기록을 하는 것처럼요. 온틈이라는 브랜드가,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버려지는 그 시간과 공간을 붙잡아 둘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거죠.
세훈: 좋은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나만의 틈을 만드는' 아주 사적인 팁 하나를 공유해 준다면요?
정현: 저는 '적는 것'을 좋아해요. 제 생각을 정리하려면, 일단 모든 생각과 정보를 다 나열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다 적어 내려가는 과정. 그 과정 자체가 틈이 될 수 있으니까, 일단 뭐라도 적어보면 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정현 님과의 대화는, ‘틈’이 단순히 비어있는 시간이 아니라, 타인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자 서로가 맞물릴 수 있는 매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던 촘촘한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빈틈을 기꺼이 인정하고 타인의 틈과 맞물릴 때, 우리는 비로소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당신은, 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조금 내려놓고, 누군가와 맞물릴 수 있는 당신만의 다정한 ‘틈’을 내어주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