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젊은 여자 담임선생님이었는데 일기장에 댓글을 정성스레 달아주시는 분이었다. 내가 적은 일기 아랫부분에 선생님의 아기자기한 글씨로 적은 댓글을 수십 번 반복하여 읽었다. 일기를 내고 난 후, 검사한 일기장을 받을 때 그냥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혀있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선생님이 나를 이토록 챙겨주시는구나!' 싶어서 혼자 감동했던 그때가 생각난다.
초등교사가 되어 그 감동을 나의 반 아이들에게도 주고 싶었다. 사실 교실에서 하루 종일 같이 생활해도, 교사와 아이들이 사적인 이야기를 할 시간은 별로 없다. 쉬는 시간에는 친구들끼리 어울려서 놀고, 교사는 어떤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지, 무슨 놀이를 하는지를 살펴볼 뿐이다. 활발하고 붙임성 있는 몇 명 아이들이 교사에게 와서 대화를 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교사와 사적인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학기 초에 나는 아이들에게 말하였다.
"선생님이 학교에 와서 여러분과 이야기할 시간이 거의 없어요. 여러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가족들 분위기는 어떤지,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등을 알지 못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일기입니다. 일기장으로 선생님과 대화하는 거예요."
그날그날 일기 주제를 알림장에 적어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주제에 맞게 일기를 써와서 아침에 일기장을 펴서 낸다.
주제는 내가 아이들을 파악할 수 있는 것들로 정한다. 3월 초에는 '우리 가족을 소개합니다.', '나는 커서 000이 되고 싶어요.', '나의 장점은?', '나는 이런 친구가 좋아요.' 등 그 학생에 대하여 알고 싶은 내용을 주제로 내어준다. 정말 일기라기보다는 교사와 학생의 '대화노트'가 맞을 듯싶다. 주어진 주제에 맞게 정성껏 내용을 채운 글도 있고, 대충 몇 줄 휘갈겨 쓴 글도 있다. 그에 걸맞게 댓글을 달아준다.
사실 매일 이렇게 일기장에 댓글을 다는 일은 상당한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전담수업을 하러 간 시간에, 쉬는 시간에, 점심시간에 틈틈이 일기를 읽고 댓글을 적는다. 업무가 많고 너무 바쁜 날에는 퇴근 전까지도 다 검사를 못하고 다음날 검사를 마친 후 일기장을 나눠주기도 한다. 일기장을 나눠주면 어떤 댓글이 적혀 있나 궁금해서 얼른 펴서 읽어보는 아이를 보면 내심 뿌듯해했다. 담임과 학생이 일 대 일로 나누는 은밀한 대화이다.
이렇게 아이들을 파악하는 것은 학생 지도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 학생의 가족 구성원, 가정의 분위기, 주말에 어디를 놀러 가는지, 평소에 관심사가 무엇인지 등. 개인적으로 대화할 시간이 학교에서는 없기에 이렇게 일기장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하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참 열심히 했었다. 내가 일기장에 적힌 댓글을 보며 느낀 감동을 아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담임선생님이 나를 이렇게 챙겨준다는 느낌.
물론 나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열심히 일기장을 꽉꽉 채우는 아이도 있고, 대충 두세 줄 그냥 휘갈겨 쓴 아이도 있다. 처음에는 후자의 아이들에게 실망도 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 또한 그 학생의 자유이지 않겠나 싶었다. 담임과의 글 대화에 공을 들여서 적는 아이의 일기장에는 나도 정성껏 꽤 길게 댓글을 적어준다. 대충 쓴 일기장에는 나도 대충 한두 줄 댓글을 적어준다. 그러면서 그 학생과 나 사이 마음의 거리를 확인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 나는 아빠가 되었다. 그러면서 학교에서도 이제 중견교사가 되어 부장 역할도 수행한다. 학교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과도한 업무에, 수업 준비에 정신없이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일기장에 댓글을 달아줄 시간이 없다. 결혼 전에는 정 안되면 일기장을 집에 가져가서 검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기가 있는 집에서 일기 검사는 불가능하다. 점점 아이들의 일기장에 도장이나 사인만을 하며 검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반 아이들의 소소한 일들이 예전만큼 궁금하지도 흥미롭지도 않다. 담임을 맡아한 반 아이들을 지도함에 있어서 일기장으로 대화하는 방법을 점점 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일기를 쓰는 것 자체도 부담으로 여긴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일기 쓸 시간이 없다.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 갔다가 집에 가서 학원 숙제를 한다. 다음날 아침에 학교에 와서 일기 주제를 확인하고 부랴부랴 일기를 써서 내는 모습을 보니 내가 괜한 숙제를 내어준 것 같아 미안하다.
예전에는 나의 댓글에 행복해하는 아이들이 눈에 잘 들어왔는데, 이제는 내가 내어준 일기 숙제를 부담스러워하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침에 등교하여 일기장을 급하게 적어 내는 모습이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학교를 마치고도 너무나도 바쁜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어준다는 자체가 서로에게 부담이다. 일기장으로 나누는 선생님과의 대화를 점점 뜸하게 한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주제를 내어주다가 한 번, 그러다가 흐지부지 안 하게 된다.
아이들의 일기 내용을 읽어보면 그 아이의 생각과 삶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한다. 평소에 교실에 같이 있어도 교사랑 사적인 이야기를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 아이들도 많다. 기초조사서나 학부모상담은 아이를 파악함에 한계가 있다. 실제로 아이의 일기 내용 중 자살을 자주 언급한 학생을 담임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도했던 적도 있다. 아이의 일기 글에서 묻어나는 분위기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무슨 생각을 갖고 사는지를 담임이 파악하면 학생의 머릿속이 보이는 듯하다.
출처: 블로그, 소셜스토리텔러
그런데 요즘은 일기 검사가 사생활 침해라는말도 간간이 들려온다. 담임에게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치부들이 일기 검사를 통해 담임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가정에서의 폭력, 가족들 간의 다툼, 아이를 둘러싼 세세한 주변 환경들. 개인 정보 보호, 사생활 침해 등이 더욱 강조되는 요즘이다. 담임이 그런 논란에 휩싸임을 감수하면서 일기 검사를 강행할까?내년에 담임이 된다면 일기를 내어줄지 말지 고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