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서 선긋기는 중요하다.
내가 그은 선을 확실히 보여주고 상대가 그은 선을 똑바로 인지하는 것까지를 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선긋기이다.
어릴 적에 받았던 가정교육이며 학교교육에서는 친구와 다툼이 났을 때는 조금 더 잘못한 쪽이 으레 상대의 어깨춤에 살포시 손을 가져다 대며 '미안해'라 사과하고 사과 받은 쪽도 상대의 어깨춤을 살짝 쓸어주며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전통은 꽤 오래 이어져 내려와서 내가 교사가 된 후에도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저학년 아이들일수록 그런 사과 세레모니를 능숙하게 하곤 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귀엽고 기특하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날에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학년을 가르치는 어느 해였다. 타고난 심성은 고우나 짓궂은 장난을 자주 치는 아이가 그 날도 친구를 건드려 울리고 말았다. 엉엉 울고 있는 아이와 머쓱해 하는 아이를 붙잡고 사건의 전말을 파악해보니 역시나 안절부절하며 머쓱해 하는 쪽이 사과할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 우리 00가 **이랑 놀고 싶어서 그랬구나. 그래도 친구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돼.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니?'로 시작하여 판결을 진행하였고 머쓱하던 아이는 울고 있는 아이에게 미안하다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 때까지도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꺼이꺼이 울던 아이는 넘어가는 숨소리에 알아듣기도 힘든 소리로 '괜찮아'라고 대답하였다. 세상에서 제일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답하는 '괜찮아'라니. 물론 두 아이 모두 '어깨춤 쓸어 내리기' 세레모니를 동반하였다. 꺼이꺼이 울면서도 괜찮다 답하는 아이를 보면서 찝찝한 마음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진짜 괜찮았을까. 당연히 괜찮지 않았겠지. 친구의 마음이 어떠했건 울고 있는 아이는 속상하고 기분 상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부터 배웠던 '사과 세레모니'를 능숙하게 하는 의젓함이란. 아니, 의젓함이라기보단 훈련된 익숙함에 가까웠을까. 사실 우리는 사과를 받았다고 해서 바로 괜찮아지지 않는 존재인데도 상대가 사과하면 괜찮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게 참 이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유일한 어른으로 존재하다 보면 무수히 많은 갈등을 중재하게 되는데 어떤 날은 내가 가르치는 사람으로 교실에 있는지 시시비비 가리며 판결 내리는 사람으로 교실에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아무튼 대부분의 다툼은 별 일 아닌 것으로 시작되고 시시하게 끝나곤 하는데 그 시시한 끝맺음에 내가 절대 하지 않는 것이 있다. '미안해'라 사과했을 때 '괜찮아'로 답하라 가르치는 것. 대신에 나는 존중하며 선긋는 방법을 알려주려 애쓴다.
그래서 나는 친구의 사과에도 여전히 표정이 어두운 아이에게 묻는다. '친구는 사과를 했어. 괜찮아?' 이렇게 물으면 처음엔 대부분 '괜찮아요'라고 말하지만 두 번째 물음에는 다들 고민한다. '그럼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겨도, 그래도 괜찮아?' 조금의 고민 끝에 '그건 안 괜찮아요'라는 대답을 들으면 나는 말한다. '그럼 친구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어떤 부분이 싫었는지 말해줘.' 아이들은 막상 자기 마음을 표현할 기회가 생겨도 선뜻 말로 풀어내지 못한다. 복잡한 심경을 스스로 헤아리는 것이 어려울 뿐더러 언어로 치환하는 것은 성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니 그럴만도 하다. 그럴 때 나는 최대한 먼저 살아본 사람으로써 그 아이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보려 노력한다. 그리고 아이가 자기 마음의 선을 언어로 그어낼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건 괜찮은데, 저런 건 안 괜찮아' 라고.
두 번째 물음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는데,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거나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아이의 경우이다. 실제로 '지금', '괜찮지 않은' 아이에게는 물음 대신 이렇게 말해준다. '지금 기분이 완전히 괜찮지 않거나 사과를 받아줄 기분이 아니라면 마음을 그대로 말해도 돼. 단, 용기내 사과한 친구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어지면 그게 언제라도 미루지 말고 알려주렴.'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지만 실제로 괜찮지 않다고 말해본 적 없는 이가 대부분이기에 아이들 역시 조금은 주저한다. 그럼에도 상대에게 '괜찮지 않다' 말하는 용기와, 괜찮아졌을 때 사과한 이의 마음을 비로소 받아주는 존중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기에 어색해하는 아이에게 알려준다. '지금은 안 괜찮은데, 나중엔 괜찮을거야'라고 선긋는 방법을.
습관처럼 화해하는 '사과 세레모니'가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아이들이 사소한 일에 오랫동안 마음 상해 있는 게 어른들에게 가장 번거로운 일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미안해, 괜찮아를 주고 받았을 때 가장 괜찮은 사람은 사실 그 장면을 마무리해야 하는 어른인거다. '그래, 다 싸우면서 크는 거고 사과하고 화해했으면 잘 해결 된거야.' 라고 생각하고 싶은 어른들이 만든 게 바로 '사과 세레모니' 아닐까. 너무도 간편하고 시시한 끝맺음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마성의 알고리즘. '상대가 사과하면 나는 괜찮다 답한다'. ' 말만 오가면 조금 무심해보이니까 살짝의 스킨쉽을 보탠다.'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사과 세레모니'가 조금 미안해진 그 이후로 나는 아이들의 다툼을 그런 식으로 마무리 짓지 않는다. 물론 매우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필요한 어려운 과정이다.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상대가 그은 선을 똑바로 인지하는 것까지 선긋기라고 생각하는데 이 과정은 내 선을 긋는 것보다 더 어렵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나의 마음 표현을 받아주지 않으면 실망한다. 실망감은 상대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끼게 하고 이 서운함은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정말이지 많은 사건을 만들어 낸다. 오해 없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럴 수도 있지', '나와 다를 수 있지'라는 마음을 새겨주려고 참으로 고군분투 하였다. 그렇게 꽤 긴 시간 교사로 살면서 알게된 것은 타인의 선긋기를 존중하는 마음은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존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자존감을 유행어처럼 말하는 오늘날의 우리는 과연 제대로 자존감을 길러주는 교육을 받은 적 있을까. 지금 이런 글을 쓰는 나만해도 20대까지 상대에게 선긋기를 참 어려워했고, 상대가 보여주는 선에 상심했다. 그리고 왜인지, 선긋기는 밀어내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용기내서 표현한 나의 호의이든 사과이든 거절 당하는 순간 내가 소모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짜 안 괜찮아도 되는지'를 경험 해보지 않아서라고 이제와 생각한다. 나이가 든 어느 날 한 번 말해본 '안 괜찮아'는 '안 괜찮아도 괜찮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해준 경험이었다. 타인의 거절에도 나는 갉아지지 않았고, 내 마음은 평가절하 되지 않으며 그와 아주 멀어지지도 않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며, 직접 겪으며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에 나는 비로소 많은 것으로부터 괜찮아졌다. 불편한 행동, 날선 말들, 이해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말이다.
그래서, 관계에서 선긋기는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더불어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내 마음을 헤아려 나의 선을 긋는 것. 그리고 타인이 용기내어 그은 선을 현명하게 헤아려 존중하는 것. 지금은 관계가 전부인 이들에게 인생이 생각보다 길고 인연은 기대보다 많다는 삶의 진리를 말로 다 설명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는 모자라지 않을 만큼 알려주려 노력 중이다.
아! 이런 선긋기는 땅따먹기와는 달라서 더 가차없이 선긋는 쪽이 이기는 그런 싸움은 아니란 것도 빼먹지 않아야 한다. 땅따먹기 보다는 내가 그은 선과 꼭 맞는 선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가는 퍼즐 맞추기에 가깝다는 것을. 이기고 지는 땅따먹기를 할 것인지, 예쁜 그림을 완성하는 퍼즐 맞추기를 할 것인지. 인생을 어떤 여정으로 만들지는 관계의 선긋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달렸을지 모른다.
글쓴이 : 최영인 (수원천천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