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문법, SNS 그게 뭐죠?
평소 얼리어답터와 거리가 멀다. 뒤늦게 (사야만 고칠 수 있다는) 아이패드 병에 걸려서 '노션으로 자기 계발 일정관리하고 그림도 멋지게 그려야지'하는 포부로 아이패드 프로 시리즈를 충동구매했다. 그림 그리는 프로크리에이트 앱까지 유료 결제했으나 구매한 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튜브 영상 보는 용도로 쓰고 있다. 노션은 생각보다 기능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가 구입한 아이패드에서 화면비가 잘 맞지 않아 복사/붙여 넣기 기능 정도만 쓰고 있다. 아이패드 '갖고 싶어' 병은 고쳤지만, 결국 아이패드 '어떻게 잘 쓰지' 병에 새로 걸려 버렸다.
치료법은 심플하다. 아이패드를 쓰든 쓰지 않든, 일정관리를 꼼꼼하게 잘하면 되고 그림은 무엇으로든 그리면 된다. 그런데 아이패드가 아닌 SNS로 대상을 치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디지털 시대의 역량이라는 것은 반드시 개개인의 실질적인 역량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인즉,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생각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디지털 문법에 맞아야 인정받을 수 있다.
신규 브랜드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가장 고민이었던 것이 준비한 내용을 얼마나 잘 전달할 수 있을까의 문제였다. 상업적인 정보로 넘쳐나는 페이지보다 개인이 운영하는 감성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짧은 시간에 한정된 자원으로 홍보를 하다 보니 결국 브랜드의 철학이나 메시지보다 혜택을 강조하는 광고가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분명 우리 브랜드를 좋아하고 매력을 느낄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유명하지 않아도 찐 팬을 끌어 모은 작은 브랜드들의 '전략'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일까...
요즘 릴스나 쇼츠 같은 숏폼이 필수라는 이야기에 우리의 콘텐츠로 릴스에 도전해 보았다. 콘텐츠를 필사하는 장면을 찍어 보려고 한참을 이리저리 카메라 앵글을 맞춰보다가 자리에 앉은 지 십여 분 만에 촬영을 시작했다. 전달하고 싶은 것은 필사하는 콘텐츠인데, 영상으로 담다 보니 조명이며 배경이며 자잘한 것들이 눈에 거슬렸다. 심지어 열심히 적다 보니 손이 앵글 밖으로 나간 컷들이 있어서 쓸 수 없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적다 보니 영상의 총시간은 15분 59초.
이제 짧은 숏폼으로 줄이는 것이 문제였다. 개인 SNS도 잘 안 하다 보니 간단한 작업 또한 고난이었다. 아이무비 앱으로 옮겨서 짧게 줄이고, 짧게 줄이고, 짧게 줄이고를 반복했다. (심지어 아이무비에서 가로, 세로 전환이 안 되는 것 같아서 중간에 사진첩에서 영상을 가로로 전환했다가 어플에 들어갔다가 줄이고를 반복했다.) 아이무비에서 한 번에 절반까지만 줄여져서 15분 59초 영상은 다음에 8분, 그다음에 4분, 그다음에 2분, 그다음에 1분이 되었다. 또 한 번 더 줄여서 30초를 만들었더니 눈으로 보는 30초는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다시 줄이기를 반복해서 결국 13초가 되었다. 배경음은 반드시 뉴진스의 최신곡 'Cool with you'로 해야지.
최신곡의 알고리즘에 기대어 13초가 되어버린 15분 59초 영상 속 콘텐츠는 (정확한 시간을 세지는 않았지만) 15일 이상은 족히 고민하다 나왔을 것이고 텍스트를 정리하는 데만 15시간 이상이 걸렸을 것이다. 최초로 콘텐츠를 기획할 때는 느리고 깊이 있는 시간을 가져가자는 뜻이 있었는데, 혹여나 이 메시지가 아이캐칭을 못할까 시간을 줄이고 또 줄이는 나의 모습을 보니 사뭇 현타(?)가 느껴졌다.
퇴근길에 서점에서 SNS 마케팅 관련한 책을 한 권 샀다. 안에 담긴 정보가 굉장히 실용적이고 자세한 것 같아서 골랐는데, 책날개에 적힌 저자의 프로필을 좀 더 확인하고 살 걸 그랬나 보다. 집에 돌아와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운영하는 계정을 하나씩 들어가 보았다. 계정당 팔로워 수가 적으면 100명 미만부터 많아봤자 500명이 되지 않았다. 물론 트렌드를 캐칭 해서 잘 분석하고 인사이트를 담아 책으로 내는 것과 본인의 계정을 인플루언서급으로 올리는 것은 다른 영역이다. 하지만 급격히 책에 대한 신뢰도를 잃으면서 그냥 나도 내 맘대로 부담 갖지 말고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를 즐겨야겠다 마음먹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15분 59초 영상을 13초까지 만든 고난의 역사를 설명하니, 신랑이 한 마디 했다.
역시 디지털 시대의 사람은 디지털 기기부터 잘 다루는 것으로.
ⓒPhoto by Firmbee,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