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2
01 남겨진 것들
EP앨범 [남겨진 것들]의 1번 트랙 ‘남겨진 것들’입니다. 곡의 이름과 앨범 이름이 같습니다. 한 곡의 제목이지만 당시의 저와 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항상 저의 욕구보다는 타인의 욕구를 저의 앞에 두고 지내왔습니다. 그렇다고 저의 의지나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언제나 뒤돌아 후회하고 가슴을 치는 일이 잦습니다. 이 ‘남겨진 것들’을 만들 당시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합니다. 꽤 큰 어린이가 될 때까지도 산타 할아버지를 믿고 꼭 머리맡에 양말을 두고 잤으니까요. 아마 12살이었을 겁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엄마의 가방 안에서 크라프트지로 곱게 쌓인 책처럼 보이는 선물을 발견했습니다. 설마 이게 내일 내 머리맡에 있지는 않겠지. 불안해하며 잠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것이 저의 머리 위에 있었습니다. 그제야 엄마가 산타였구나 깨닫고 꽤나 상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에도 저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합니다. 종교는 없지만 겨울과 연말의 분위기를 좋아해 늘 가족이나 친구 애인과 시끌벅적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겨울,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게 되었습니다. 당시 애인이 있었지만 그런 상술뿐인 이벤트에 의미를 두지 말자는 말만 제 옆에 있었습니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맞는 말인데 나는 왜 이렇게 어둡고 슬픈 기분이 들까? 모르겠더라고요.
이 곡의 시작은 이렇게 조금 웃긴 에피소드로 시작했습니다만 돌이켜보니 저는 늘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 보고 싶은 것, 사랑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잘 못해왔던 것 같습니다. 타인의 기분이 먼저였고, 저는 눈치를 보며 그 동태를 살폈습니다. 감정에도 옳고 그름이 있는 것처럼 굴며 나의 감정을 억눌렀고, 바라는 것이 있어도 말하지 않고 지내다 보니 애초에 바라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지냈던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나를 뒤로 미뤄두니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기분이었습니다. 완전히 혼자된 느낌 아니, 혼자도 되지 못한 느낌. 나라는 존재가 뿌연 안개처럼 존재하지만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흐릿한 형체의 사람이 아주아주 어두운 길을 걷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머리 위에 떠 있는 달뿐인데 그 달마저 나보다 한참 앞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떨어지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위태롭고 비틀비틀한 느낌을 주기 위해 기타 연주도 높은 음의 스트로크가 불안정하게 들리기를 바라며 연주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 느낌이 났으면 했습니다.
02 화분
파워풀한 비올라 연주로 시작하는 곡입니다. 곡을 만들 때부터 보다 더 파워풀한 밴드 셋으로 편곡을 하고 싶었으나 당시에는 확신이 없어 단순하게 완성이 되었습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의 높낮이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좋아했던 친구가 주인공이었던 연극을 보러 갔습니다. 한 사람이 겪은 여러 연인의 이야기를 다뤘던 연극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주인공의 마지막 연인은 화분을 키웠는데, 그 화분마다 저마다의 이름표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 연인과 헤어지며 내레이션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언니에게 이름 붙여지고 싶었을 뿐이에요, 언니가 키우는 화분들처럼요” 이 마지막 대사가 가슴에 박혀 연극이 끝나고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 한참을 객석에 앉아 울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것은 그저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전부였구나, 뒤늦은 후회와 깨달음이 몰려와 복잡했습니다. 그 주인공의 마음을 제가 헤아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제가 느꼈던 터질 듯한 감정을 노래로 담고자 했습니다. 저의 마음을 표현하기 두려웠고, 그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무서웠습니다. 그래서인지 가사가 난해하다는 평을 제일 많이 듣는 노래이지만 의외로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이기도 합니다.
당시 앨범 작업을 도와주셨던 프로듀서님께서 라틴리듬으로 편곡해 보면 어떨까 제안해 주셨고 베이스와 퍼커션으로 그 느낌만 가져왔습니다. ‘카라바시’라는 아프리카 악기로 타악을 연주해 납작하면서도 독특한 소리가 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괜찮아요’라는 가사가 나오는데요. 저는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고 불렀는데 오히려 이 괜찮아요 덕분에 위로를 받는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되뇌면 결국은 괜찮아지는 걸까요?
남겨진 것들 & 화분 듣기
: https://youtu.be/P9V4trd0m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