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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seong Lee Jan 13. 2024

왜곡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사진은 보정을 거쳐서 완성된다. 이 말을 지인들에게 하면 꼭 이런 반문이 돌아온다.

    "그럼 그냥 그림을 그리는 낫지 않아요? 그건 현실이 아니잖아요."

    사실 사진에 맺히는 상도 왜곡의 결과이다. 나를 둘러싼 360도의 풍경 중에서 극히 일부분을, 혹은 특정한 피사체를 16*9, 4*5 비율의 프레임에, 내 시선의 각도에 렌즈를 맞춰 담는 것 또한 왜곡이다. 이렇듯 보정만큼 사진을 찍는 과정 그 자체에도 수많은 편집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편집은 나의 감상을 담고자 하는 의지, 혹은 그것을 타인에게(미래의 나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방이다. 그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더 잘 설득하기 위해서 보정이라는 편집 과정을 한번 더 거칠 뿐이다. "나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왜곡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의 어원이 techne(기술)인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예술가들은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남에게 설득할 수 있는 뛰어난 '편집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왜곡하는 방식을 택했다

    사진에 관한, 예술에 관한 이런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예술은 인간의 인지적 능력의 한계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시회를 둘러보다가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내가 보고 있는 세상' 혹은 '내가 놓치고 있었던 세상'을 마주할 때이다. 관객은 작가의 생각에 공감을 하기도 하고, 부끄러움이나 당혹감을 느끼기도 한다. 각자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이 다르기에 작품을 보고 난 뒤 느끼는 감상도 천차만별이다. 인간의 한계가 역설적으로 그 작품을 더 풍성하게,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재미있게도 예술의 힘을 빌려 인간의 한계가 가져오는 비극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그것도 굉장히 친절히. 관객이 놓칠세라 요목조목 짚어주면서 '당신이 놓치고 있었던 세상'들을 펼쳐 보인다.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봤을 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총 세 번 반복되는 장면인데, 바로 학교에 찾아온 사오리가 학교 앞에 후진 주차하는 장면이다. 세 번 동안 각기 다른 앵글로 그 장면을 보여주는데, 첫 번째는 차량 A필러 쪽 옆면에서, 두 번째는 차량 정면에서, 마지막은 운전석 내부에서 보여준다. 주차를 하기 위해 백미러와 사이드 미러, 그리고 후방 카메라를 차례로 살피는 사오리를 담는 그 장면에서 뒤편에 위치한 기둥에 부딪히고 만다. 결국 우리는 인간이기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시야의 한계를, 계속 보고 있었음에도 사고를 당할 수밖에  없는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는 사오리의 부주의함에 혀를 찼다면, 두 번째로 관람할 때는 나의 오만함을 돌아봤다. 사오리보다 내가 놓친 것들이 더 많았다.


      나는 참 무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나는 그것이 "관찰력이 부족하다"와 비슷한 의미로 이해했다. 실제로 나는 물건을 잘 찾지 못하고, 타고난(?) 길치이며, 친구들이 알려준 정보들을 쉽게 잊곤 한다.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는지, 옷을 새로 샀는지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는 질문을 받으면 매번 당황한다.       

      하지만 히로카즈의 영화를 보면서 관심의 정도를 가늠할 때에는 시선의 깊이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러닝타임 내내 부지런히 앵글을 돌려가며 "당신이 놓쳤던 이유는 다른 소중한 것에 관심이 쏠렸을 뿐"이라며 인물들을 위로하기도 하고, 편협한 시각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쉽게 판단한 당신을 타박하기도 한다. 차근차근 내가 오해한, 그리고 외면한 것들을 보여주면서,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의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_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내가 읽었던 혹은 들었던 문장들 중에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줬던 문장이다. 이 문장을 접하고 나서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나의 현재는 얼마나 두터운가에 대해 점검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점에서 최근 보았던 영화들 중에서 가장 나를, 그리고 나의 왜곡된 시선들에 대해 많이 돌아보게 만든 영화다. 나는 한 줄평을 좋아하진 않지만 누군가가 이 영화에 대해서 짧게 감상평을 해보라고 한다면 이렇게 적을 것 같다.

    예술에 있어서 인간의 인지적 능력의 한계가 축복이라면, 삶에 있어서는 비극이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괴물>과 같은 영화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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