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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Aug 11. 2023

런던 지하철에서 ‘전기톱 소리’가

'끼익~'

금속끼리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때린다.

한순간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강한 압력이 고막을 짓누르고 지나간다.

급기야 소음 한도치를 넘었다는 워치 알림 메시지가 뜬다.


최근 스웨덴에서 영국으로 건너와 경험한 런던 지하철의 강렬한 첫인상이었다.

런던 지하철은 1863년 세계 최초로 개통됐다. 올해 170주년이었다.

1863년은 조선시대 끝에서 두번째 임금인 고종이 즉위한 해다. 우리가 상투 틀고 갓 쓰고 소달구지 몰 때 런던에선 땅 밑으로 강철 기차가 다닌 거다.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튜브(tube)라고도 부르는 런던 지하철을 매일 이용하면서 가장 힘든 건 비좁은 객차, 에어컨 없는 낡은 시설, 승강장 내 매캐한 연기, 인터넷 불통도 아닌 소음이었다.

모든 구간이 그런 건 아니지만 바로 옆사람과의 대화가 불가능할 만큼 굉음이 전동차 안으로 밀려들어올 때가 많았다.

지하철을 같이 탄 우리 집 삼남매는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이런 지하철을 어떻게 타는 거지?'

"록 콘서트 현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

2018년 영국 공영방송 BBC는 런던 지하철 객차 내 소음을 자체 측정한 결과를 보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리버풀 스트리트~베스널 그린 구간의 최대 소음은 109db(데시벨)에 달했다.

헬리콥터가 이륙할 때 내는 소리인 100데시벨을 넘어서고 전기톱 소리(110데시벨)에 가깝다고 했다.

다른 9개 구간의 최대 소음도 105데시벨이었다.

측정한 10개 구간의 평균 소음도는 91~97데시벨이었다.

런던대학교 청력연구소 조 솔리니 박사는 "8시간 동안 평균 85db 이상의 소음에 노출되는 일터는 직원들에게 청력 보호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면서 런던 지하철 소음이 "우려스러운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솔리니 박사는 "매일 시끄러운 지하철을 오랜 시간 타야 하는 이들이라면 청력상실 또는 이명이 생길 위험을 높일 수 있다"며 지하철 소음이 "청력을 손상할 정도"라고 덧붙였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시민 로버타 레너트는 "귀청이 터질 것 같은 소음"이라며 지하철 안에서 귀마개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2018년 연합뉴스 기사인데 지금도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환기창으로 여과 없이 들어오는 런던 지하철의 ‘헬리콥터 소음’은 가만 앉아있기 힘들 정도였는데 런던 시민들은 마치 묵언수행하는 것처럼 잘 견뎠다.

더군다나 에어컨이 없어 환기 목적으로 항상 개방해둔 객차 양끝의 통로 창문으로 터널 내 켜켜이 쌓인 분진 등 미세먼지가 전동차 안으로 들어왔다.

장시간 런던 지하철을 탄 뒤 코를 풀면 검댕이 묻어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시민 건강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라는 전통과 명성이 있어도 이건 아니었다.


1985년 1호선이 개통한 부산지하철은 2005년 지하철 소음 문제가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지하철 1호선 33개 구간 중 23곳, 2호선 38개 구간 중 24곳에서 소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도시철도 제작 기준인 80데시벨을 넘고 90데시벨을 넘는 곳이 2곳이나 돼 지하철 소음 피해 손해배상 공익소송까지 제기됐다.

이후 부산교통공사는 소음 저감 대책을 세우고 신형 전동차를 도입해 소음을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런던보다 지하철 개통이 100여년 뒤처진 한국도 이럴 진데 런던 지하철은 뭐 하는 건가 싶었다.

런던지하철 피카딜리 라인 전동차 내부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전기톱 소리에 육박하는 소음에 비하면 런던 지하철의 인터넷 불통은 애교 수준이었다.

지하철 개찰구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스마트폰은 먹통이 됐다. 수신 안테나와 통신사 이름이 사라졌다.

미리 구글지도로 목적지 검색을 해두지 않았다면 초행길에 꽤 고생했을 듯싶다.

거참 스마트폰 시대에 인터넷 안 되는 런던 튜브에서 마주 앉은 다른 승객을 앞에 두고 시선 처리가 참 곤란했다.

창문 위에 붙은 애꿎은 피카딜리 라인 노선도만 바라보다 역명을 거의 외울 지경이었다.

튜브에서 책 읽는 런던 시민들

멀뚱멀뚱 지하철 타는 게 고역이라 다음부턴 책을 들고 탔는데 며칠새 한 권을 다 읽었다.

런던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줄이야... 그럼에도 소음 구간을 지날 땐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이 되지 않아서인지 책이나 신문을 보는 승객이 많았다. 또는 스도쿠나 낱말 맞추기를 하는 이들도 보였다.

지하철을 타면 잠시 스마트폰을 닫고 반강제로 종이 활자를 읽는 런던 시민들 낭만적(?)이었다.

지하철 독서족이 많아서였을까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헤르미온느 역을 맡았던 엠마 왓슨은 2016년 런던 지하철에서 책 100권을 숨겨놓고 시민에게 나눠 읽자고 '북스 온 더 언더그라운드'(Books on the Underground) 캠페인에 동참해 좋은 반응을 이끌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지하철에 놔두고 시민들과 돌려 읽는 '북스 온 더 언더그라운드'는 2012년 시작돼 지금까지 150권 이상의 책이 지하철 곳곳에 있다고 한다.(난 지하철 곳곳에 숨겨놨다는 책을 보진 못했다)

지하철에서 책 나눠 읽자고 한 엠마 왓슨의 인스타그램 (사진=연합뉴스)

런던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SNS를 하는 이들도 얼핏 있었다.

내 건 안되는데 왜 다른 이들은 되는 건지 궁금했다.

와이파이를 켜고 관찰했는데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와이파이 신호가 승강장에서는 잡히는데 전동차가 역을 떠나면 사라졌다.

역과 역 사이만 불통이었다.

난 영국 현지 유심이 아닌 공용 유심을 사용해 안 되는 것이었고 EE나 THREE, Vodafone 등 현지 통신업체를 이용하는 사람은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듯했다.

단 역 대합실, 통로, 승강장에서만.

런던 지하철에서 노트북 등으로 업무를 보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 걸까, 급한 전화가 걸려오면 어쩌나, 런던 시민들은 이런 인터넷 불통 환경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걸까 신기했다.

세계 최초 지하철을 하나의 전통 유형 자산으로 보고 불편해도 감내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런 런던 지하철의 낭만도 얼마 남지 않았다.

TFL(Transport For London) 홈페이지를 보니 2024년 말까지 모든 런던 지하철역과 터널 내에 인터넷을 연결하고 휴대전화 신호를 받을 수 있는 5G 커버리지를 구축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때가 되면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모바일 불통 지역 중 하나가 사라진다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서.

현재도 주빌리(Jubilee) 라인, Central 라인, Northern 라인 일부 구간에서 전화나 인터넷이 가능하지만 전체 라인으로 확장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지하철 어디에서든 끊김 없이 전화나 문자메시지, 웹 서핑, 소셜 미디어 등을 할 수 있게 된다.

넷플릭스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전동차가 가장 노후한 노선 중 하나인 피카딜리 라인엔 새 전동차가 도입돼 승객 건강을 위협한 운행 소음도 줄어들 전망이다.

2025년까지 25억 파운드(약 4조8천505억원)가 소요되는 투자프로그램의 하나로 97대의 신형 전동차가 도입돼 1975년부터 50년 가까이 운행 돼온 낡은 튜브를 대체한다.

소음 저감은 물론 냉방이 가능해져 보다 쾌적한 이동이 가능하겠지만 분명 인터넷이 안 되는 지하철, 과거의 낭만 튜브를 아쉬워하는 런던 시민도 있을 것 같다.

런던지하철은 언더그라운드가 아닌 지상인 오버그라운드 구간도 있다

최근 런던 지하철에서 하루새 철로 투신사고 2건이 발생했다.

7일 오전에 퀸즈웨이 역에서, 오후 피카딜리 라인 북부지역에서 각각 사고가 났다.

런던지하철을 이용해 보니 승강장 폭이 좁아 자칫 발을 헛디디면 철로로 떨어질 수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러웠는데 무척 안타까웠다.

이날 아내와 아이들이 평소 40~50분이면 집에 올 거리를 지하철 운행 중단으로 버스를 3번 갈아타고 2시간 30분 만에 왔는데 알고 보니 이런 사고가 있었던 것이었다.

세계 최초라는 런던지하철에는 몇몇 역에만 스크린도어가 설치돼 있는 듯했다.

거의 전 노선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한국지하철과 무척 대조적이었다.

408km로 세계에서 가장 긴 노선을 보유한 런던지하철 전체 역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하려면 막대한 예산이 필요할 것이다.

돈 문제를 떠나 비좁은 승강장에 전동차 운행을 하면서 스크린도어 설치 공사를 겸하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하다.

잇단 지하철 투신사고를 접하면서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브레이크', '미안해요 리키' 영화가 떠올랐다.

한때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국가 영국에서 팍팍하고 신산한 삶의 이면을 본 것 같아 씁쓸했다.

주빌리 라인 웨스트민스터 역 승강장에 설치된 스크린도어

그럼에도 런던 지하철 승객의 친절은 잊을 수 없다.

복잡한 출퇴근 시간에도 아이를 우선 배려해 자리를 양보하고 행여 아이가 부모와 떨어져 앉을까 좌석을 바꿔준 런던 시민은 참 따뜻했다.


다소 불편했지만 낭만과 정이 있는 런던 지하철 꽤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런던 지하철을 타는 모든 시민의 무사 안녕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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