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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Nov 28. 2023

기후위기보고서에 원주민이 나온 까닭

지난 1년간 스웨덴에서 살면서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스웨덴이라는 근대 국가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스칸디나비아반도 북부 지역과 러시아 북서부에서 살아온 사람들.

사미족이다.

라프인(Lapp), 사프미(Sapmi)라고도 부르는 원주민이다.

라프라는 말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고위도 지역을 일컫는 라플란드(Lapland)라는 지명의 유래가 됐다고 한다.

인구는 스웨덴에 최소 20000명, 노르웨이에 50000명, 핀란드에 8000명, 러시아에 2000명 등 총 8만명으로 추산된다.

유럽의 유일한 원주민인 사미족은 자기들만의 언어와 문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스칸디나비아 북부에서 자연과 함께 자연을 존중하며 순록을 키우고 살아왔다.

어쩌면 스칸디나비아의 진정한 주인이었으나 항상 외부와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순록과 사미족 여성 (사진=sweden.se)

올해 2월 초 스톡홀름시 홈페이지에서 우연히 '사미족의 날' 행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꼭 가보고 싶었다.

스칸디나비아 동토에서 자연을 지키며 살아온 사미족을 보고 싶었다.

2월 6일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스톡홀름 시청사로 갔다.

근데 이미 행사가 끝나 있었다.

행사 시작이 오전 8시 30분이었는데 오전 10시로 잘못 봤다.

빨강, 파랑, 노랑, 녹색의 사미족 깃발이 여기저기 흩날리고 있었고 행사를 마친 사미족이 시청사를 나오고 있었다.

행사를 꼭 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안타까운 마음에 시청사 앞에 있던 사미족 여성에게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정중하게 부탁하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왠지 그냥 돌아서기가 마음에 걸려 아내가 가방 속에 든 박하사탕 한통을 드렸더니 놀라시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사미족의 역사를 담은 스웨덴 영화가 있다고 해서 보려고 했었는데 결국 못 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통의상을 입은 사미족분들과 사진 한 장

11월 초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스웨덴영화제가 열렸다.

마음 같아서는 상영작 10편을 모두 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다 볼 수는 없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다.

사미 스티치(Sami stitches). 사미족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스웨덴에서 돌아온 지 석 달 만에 듣는 영화 속 스웨덴어는 정겨웠다.

사미족 여성 예술가 브리타 마라카트-라바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배운 자수로 사미족의 투쟁과 삶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녀는 영화에서 "전 투쟁 속에서 태어났어요. 사미인으로서 저는 항상 싸워야 했어요. 종교탄압에 맞서고 국가의 폭정에 맞서며 영토, 문화에 대한 침략에 맞서 항쟁했어요. 그리고 이제 기후변화에 맞서 또 다른 투쟁을 벌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우리는 최후를 맞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스웨덴영화제 개막식

사미족이 학대와 폭력, 인종차별로 가득 찬 역사를 살아온 건 조금 알고 있었다.

스웨덴 정부가 뒤늦게 사미족을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고 그들만의 문화, 언어, 의회 등 자치권을 인정했지만, 2019년 사미 의회는 스웨덴 정부의 폭력적인 정책이 사미족에게 미친 영향을 검토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스웨덴 정부는 2021년 11월 사미족이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립하도록 120만 크로나(144000유로, 약 2억 515만원)를 지원했다. 위원회는 2025년 12월 1일까지 활동하며 그동안 박해받은 사미족의 역사를 세상에 공개할 예정이다.

'사미 스티치'라는 영화는 사미족의 핍박받은 역사를 주로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빗나갔다.

물론 그 자체로 투쟁의 역사였던 사미족의 삶을 다루면서도 기후변화의 최전선에서 삶이 송두리째 없어질 위기에 처한 그들의 현실을 이야기했다.

사미족은 '멸종위기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미족 여성 예술가 브리타 마라카트-라바는 영화에서 "우리가 귀를 기울이는 한 자연은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걸 이야기해요. 이것이 바로 사미족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자연의 목소리와 대화하며 교감할 수 있다는 말이 놀라웠다.

실제 자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거짓으로 들리지 않았다.

감독 역시 영화 상영 후 인터뷰 영상에서 자연을 하나의 생명체로 보여주고 싶어 수없이 많은 장면을 찍었다고 했다.

스웨덴 영화 '사미 스티치'

사미족 여성 예술가 브리타 마라카트-라바, 그녀가 살고 있는 스웨덴 북부 키루나에서 올해 초 희토류가 발견돼 스웨덴은 물론 유럽 사회가 흥분의 도가니다.

거의 중국에 의존해 왔던 희토류를 자급할 수 있게 돼서다.

희토류는 반도체, 전기차, 스마트폰 제조에 필수 광물로 전략자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희토류를 채굴하기 위해 땅을 파헤치고 자연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데 사미족은 다시 그들이 사는 땅을 내줘야 하고 생업인 순록 방목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전통인 순록 목축을 하지 못하면 사미족은 고유의 문화와 언어, 삶의 터전도 잃어버릴 것이다.

더군다나 순록들은 기후변화로 겨울 눈 아래에 있는 이끼를 못 먹어 겨우내 개체수가 절반이나 감소하는 걸 영화는 사미족의 눈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그런 순록의 절멸 위기와 순록을 방목하며 사는 사미족의 불안, 우울, 절망을 표현했다.

영국 가디언 방송의 기후변화와 사미족 다큐멘터리 한 장면

사미족은 댐 건설, 광산 개발 등으로 계속 유랑했는데 이제는 기후변화로 따뜻해지는 날씨 때문에 전통은 물론 정체성, 살 곳마저 잃을 위기에 놓였다.

사미족은 그저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을 뿐이었다.

자연에 귀 기울이라는 사미족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인간들이 자연을 마구 파헤쳐 얻은 화석연료를 태운 결과는 사미족 같은 원주민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히고 있다.

유엔 산하 각국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The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는 1988년 설립돼 1990년 최초 보고서를 낸 이후 지금까지 총 6편의 종합보고서를 냈다.

2022년 IPCC 보고서에서 사미족과 같은 원주민을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기후위기의 공동 대응과 대책을 위해 만들어진 IPCC 보고서에서 원주민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처음엔 의아했다.

도대체 기후변화와 원주민이 무슨 상관이 있기에.

스웨덴 다큐영화 '사미 스티치' 엔딩 크레디트

기온 상승, 자연재해, 생태계 파괴 등의 결과로 나타나는 기후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고 사람과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스웨덴 기후환경단체 '오로라(Aurora)'는 말한다.

'오로라'는 기후위기가 경제적 이익을 앞세운 결과라며 인종 차별적 가치를 가진 식민지 개척자들이 자연에 무자비하지 말라는 원주민의 경고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특히 식민지 개척자들은 사람과 화석연료를 포함한 천연자원을 착취하고 이로 인해 생태계 파괴, 종 멸종, 오늘날의 위기를 초래했다며 식민주의(Colonialism)는 신식민주의로 발전해 원주민들을 직접 착취하는 체계가 됐다고 '오로라(Aurora)'는 지적했다.

2022년 IPCC 보고서는 바로 이 식민주의가 기후 위기의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처음 언급한 것이었다.

현재 전 세계 90개국 이상에서 5천개 종족이 넘는 다양한 원주민이 있으며 인구 수는 약 3억7천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세계 인구의 5%다.

해안, 고위도, 높은 산, 열대림 등에 주로 사는 원주민들은 기온 상승, 해수면 상승, 숲 파괴 등 기후위기에 직격타를 맞고 있다.

원주민에게 자연은 곧 집이고 사회, 경제, 문화 활동의 전제조건인데 기후위기는 전통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가치와 지식의 상실로 이어진다.

약 7천만명의 원주민이 생계를 위해 숲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원주민은 삶의 근거인 숲을 보호할 수밖에 없다.

숲뿐만 아니라 열대우림 등 거주지역의 토지와 환경을 어떻게 사용하고 보호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런 원주민의 여러 세대에 걸친 지식은 효과적인 기후위기 대책에 매우 중요하다.

원주민이 사는 곳에서 다양한 생물이 사는 건 우연이 아니다.

실제 전 세계에서 그 수가 단 5%에 불과한 원주민의 거주지역에서 세계 생물 다양성의 80%가 보전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원주민의 전통 지식은 생물다양성협약(CBD)에서 이미 인정됐고, 지구 온도를 2도 이하로 억제하기로 결정한 파리 협정에서도 원주민이 가진 지식이 기후 목표 달성에 매우 중요하다고 콕 집어 말하기도 했다.

 

원주민들은 단순히 미개한 인간 종족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오랜 세월 살아왔고, 어떻게 자연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지를 아는 현명한 사람이다.

이들은 또 지구 최대의 당면 문제인 기후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인 동시에 기후위기를 막는 선봉장이기도 하다.

원주민이 사는 곳이 곧 자연이고 이들을 쫓아내면 기후위기는 더 가속화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하지만 IPCC 등 기후위기 해법을 모색하는 국제단체들은 원주민의 지식이 기후위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정작 의사결정과 논의 과정에서 원주민을 배제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광업시설이 보이는 스웨덴 키루나에서 순록 목축을 하는 사미족 (사진=sweden.se)

사미족은 순록 목축을 하며 라플란드를 지키고 있다.

그들의 거주지역을 빼앗지 않으면 그만큼의 자연이 보존될 것이다.

적어도 그들만큼만 자연을 존중하고 산다면 기후위기는 없을 것이지만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 같은 현대 문명은 곧 남은 화석연료마저 거덜낼 태세다.

풍력 터빈, 광산, 임업, 관광 등으로 사미족의 순록 목초지는 자꾸 줄어들고 있다.

기온 상승으로 포식자의 활동 반경은 북쪽으로 더욱 넓어지고 순록이 자유롭게 풀을 뜯을 수 있는 곳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내가 쓰는 기름 한 방울, 사미족의 눈물일 수 있다.

자연은 계속 이제 그만하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것일 수 있다.


(## www.instagram.com/auroramalet, sweden.se/life/people/sami-in-sweden, www.naturskyddsforeningen.se/artiklar/urfolkens-dag-darfor-ar-urfolk-viktiga-for-miljon 등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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