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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귤 Jun 01. 2023

러시아 할머니의 초콜릿 케이크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기

나는 할 줄 아는 거의 유일한 러시아어, [스바시바-]를 연신 외치며 숟가락을 들었다. 엉성하게 설거지해 둔 숟가락을 휴지에 대충 쓱쓱 닦아 낸 다음, 케이크를 한 입 푹 떠먹었다. 러시아 할머니의 홈메이드 초코케이크가 입안으로 달콤하게 들어왔다. 예상보다 더 맛있었다. 진한 초콜릿 향이 목으로 타고 들어오며 설탕 결정이 조금씩 씹혔는데, 그게 꽤 별미였다. 우리네 할머니는 간식으로 김치전 혹은 구운 감자를 내주시는데, 직접 만든 케이크를 주시는 할머니라니- 꽤 생경한 느낌이었다. 할머니의 ‘손맛’이나 ‘정겨움’보다는, 부잣집 할머니의 세련됨이 묻어나는 맛이었달까.

21살, 희원이와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백일쯤 앞뒀을 때 "우리 수능 끝나면 꼭 하자-" 라며 손가락 걸었던 수백 가지 중 거의 유일하게 실행된 일이다. 희원이의 무서운 실행력 덕분이었다.     

그렇게 2019년 1월, 우리는 열차를 타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2박 3일간의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마치고 시베리아 횡단열차 삼등석, 일명 '꼬리 칸'으로 불리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모스크바까지 대략 일주일 조금 넘게 열차를 타는 여정이었다. 열차를 탑승하고 얼마 뒤, 2층 침대 옆자리에 러시아 할머니와 아저씨가 오셨다. 우리는 어설픈 억양으로 [즈드랏스부이쩨-] 라며 러시아어로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는 밝게 웃으시며 답해주셨지 안타깝게도 인사말 외에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꼬리칸

   

할머니의 뒷모습

그때만 해도 서양인들은 우리보다 영어를 잘하겠거니-하는 막연한 편견이 있었는데, 3주간의 러시아 여행으로 편견은 완전히 사라졌다. 일주일간 언어의 장벽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시종일관 우리에게 러시아 말로 말을 건네셨다.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가족 자랑을 하셨고, 신문 1면을 펼쳐 들며 이러쿵저러쿵 정치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 러시아어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마 그런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튿날 할머니가 창밖을 보며 차를 마시고 계셨다. 눈 덮인 시베리아 풍경을 디저트 삼아 뜨거운 차를 홀짝이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꽤 멋지게 느껴져 나도 괜히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러시아는 술 문화만큼이나 차 문화도 유명한 편이다. 맞은 편에 앉아 차를 따라 내리자, 할머니는 싱긋 웃어 보이셨다. 그리고는 커다란 짐 바구니 틈에서 플라스틱 통 하나를 꺼내 건네셨다. 할머니가 러시아어로 뭐라 말씀하시며 손짓하신 그 통 안에는 꾸덕하고 얇은 초콜릿 케이크가 있었다. 계피 향이 조금 나면서도 브라우니처럼 촉촉한 케이크였는데, 언뜻 보아도 할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오신 케이크였다.


나는 할 줄 아는 거의 유일한 러시아어, [스바시바-]를 연신 외치며 숟가락을 들었다. 엉성하게 설거지해 둔 숟가락을 휴지에 대충 쓱쓱 닦아 낸 다음, 케이크를 한 입 푹 떠먹었다. 러시아 할머니의 홈메이드 초코케이크가 입안으로 달콤하게 들어왔다. 예상보다 더 맛있었다. 진한 초콜릿 향이 목으로 타고 들어오며 설탕 결정이 조금씩 씹혔는데, 그게 꽤 별미였다. 우리네 할머니는 간식으로 김치전 혹은 구운 감자를 내주시는데, 직접 만든 케이크를 주시는 할머니라니- 꽤 생경한 느낌이었다. 할머니의 ‘손맛’이나 ‘정겨움’보다는, 부잣집 할머니의 세련됨이 묻어나는 맛이었달까. 


초콜릿 케이크와 차 한 잔


서양 할머니의 마음은 초콜릿 케이크 같은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한 입 더 떠먹는데, 아차, 이상한 게 씹혔다. 혀로 이리저리 발라 손가락으로 집어 빼보니 할머니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아니겠는가. 그 순간 혹시 할머니가 볼 새라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바닥으로 슬쩍 버렸다. 대신 맛이 어떤지 궁금해하시는 할머니의 눈빛에 엄지를 척 펴고 웃어 보였다. 빠진 머리카락을 걸러내진 못하셨지만 처음 본 손녀뻘 동양인에게 케이크를 내주시는 따스한 마음과 달콤한 맛이 그곳에 있었다. 초콜릿 케이크에 담긴 할머니의 마음이 그제야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래, 러시아 할머니의 초콜릿 케이크는 우리 할머니 부침개 같은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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