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교복을 입고 오가는 아이들을 보면 라떼 생각이 절로 난다. 나도 교복을 입고 저렇게 깔깔 거리며 몰려다녔었다. 그때 어른들이 우리를 보며 “좋을 때다.” “놀 수 있을 때 놀아라.” 하셨던 것을 지금 내가 그 아이들을 보며 중얼거린다. 그때의 감성 그때의 기분 그때의 민감함이 있다.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고 우리 우정은 영원해서 나중에 나이 들면 다 같이 한 집에 모여 살 줄 알았다. 지금은 같은 조건, 같은 판을 깔아놔도 절대 그렇게 재미있지가 않다. 각자 먹고살기 바쁘고 각자 사는 영역이 다르다.
나는 범생이였다. 어릴 때부터 놀라고 앉혀놓으면 책부터 찾아 읽는 애였고 학교에서도 조용히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는 애였다. 어른 말씀 어기면 큰일 나는 줄 알았고, 책에 나오는 규칙은 꼭 지켜야 되는 줄 알았다. 그때의 스승은 현실 폭력을 쓸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진짜 무서운 하늘이었으니까 선생님 말씀은 당연히 칼같이 들었다. 이런 애라 얽혀도 재미가 없으니 소위 노는 애들이 건드리지도 않았다. 즉 어차피 내가 놀아봤자 뭐 대단하게 놀 줄도 몰랐다는 이야기다.
그런 나도 가끔 학원 땡땡이를 쳤다. 라떼 이야기를 하겠다는 거다. 약 삼십 년 전의 나는 그냥 동네 번화가에 있는 큰 종합학원을 다녔다. 그때는 아직 <종합학원>이라는 게 존재해서 그 학원 하나만 다니면 국영수과 네 과목 기본 구성에 가끔 시험을 앞둔 때면 사회까지 다 봐주었다. 과목당 하나씩 돈을 받고 특강은 또 따로 돈 받는 지금의 사교육 시스템에 비하면 가성비 좋던 시절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서울 강북 구석이었고 아직 은행사거리가 강북지역 학원가로 이름 떨치기도 전이었다. 그래도 그곳 역시 대한민국 땅이라 나름의 번화가에 대형 종합 학원들이 몇 있었다. 그중 하나를 친구들과 다녔는데 어느 날 거기에 새 영어 선생이 왔다. 원장 선생님이 강남에서 어렵게 모신 선생이라며 소개해 주었다. 젊고 멀끔하고 조금 유별나 보였다. 그리고 이 선생이 결정적으로 우리 패거리를 땡땡이치게 만들었다.
이 선생이 수업을 하는 건 좋은데 수업하면서 말끝마다 자꾸 강남 이야기를 하는 거다. 강남에서는 말이지~ 강남 애들은 말이지~ 이 책은 강남에서 유명한 책인데~ 강남 강남 강남. 아 강남이 뭐 잘난 부자 동네인 건 어렴풋이 알겠는데 우리도 뭐 그렇다고 그렇게 꿇리진 않거든요? 실제로 우리는 그 학원의 소위 탑반 애들이었고 몇몇은 모의고사 0.1% 안에 드는 애들이었다. 나 왕년에 공부 잘했다는 이야기다. 모의고사 배치표를 보면서 스카이 이하는 쳐다보지도 않던 판인데, 평생 강북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를 앞에 두고 맨날 강남 애들 강남 애들 염불을 외니 슬슬 반발심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래서 영어 시간만 되면 책가방을 싸들고 튀었다.
범생이 고등학생들이 나가봐야 별 거 없다. 뭘 놀아봤어야 놀지. 요즘 여학생들은 마라탕 - 인생 네 컷 - 코인 노래방 - 탕후루 - 공차로 놀이 코스를 잡는다 들었는데 맞는지? 그때는 그런 십대용 소비 콘텐츠는 학교 앞 떡볶이집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냥 동네 팬시점 순례하며 구경하고 동네 서점 가서 책 뒤적이고 만화책 좀 골라 보다가 동네 롯데리아(맥도널드조차 아니었다!) 가서 햄버거랑 감자튀김 사 먹고 깔깔거리다 헤어졌다. 그러다 어느 해 갑자기 리듬 게임인 펌프랑 DDR이 대유행하게 되어 동네 오락실에 오백원짜리 동전을 가득 쌓아놓고 도장 깨기를 한 정도. 그때만 해도 노래방은 아직 학생은 범접지 못할 어른들의 영역이었라 몇 번 못 가봤다. 그래도 뭘 그리 할 말이 많았는지 수다가 끝이 없었다. 길에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다가 뒤집어지던 나이였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것은 학원 측이 우리의 일탈을 부모님께 알리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엄마가 다 알고도 귀찮아서 나를 혼내지 않은 줄 알았다. 그때 공부만 잘 했지 반항심도 쩔던 때라 엄마가 한마디 하면 열 마디씩 소리 지르던 애였거든(그 후 애 키우면서 엄마한테 내가 다 잘못했다고 사과를 스무 번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생각나 물어보니 아예 그런 일이 있었는 줄도 몰랐다는 것이다. 알아서 학원 가고 끝나는 시간이 되면 집에 들어오니 그냥 학원 잘 다니는 줄로만 아셨단다. 결과적으로는 그 덕에 집안도 평화로웠고 나도 알아서 대학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도 낳았으니 해피엔딩이라고 해야 하나.
스터디 카페를 하다 보면 아이를 찾는 전화를 종종 받는다. 보호자께서는 “죄송하지만”을 붙이며 아이가 자리에 있는지, 혹시 몇 시에 들어와 몇 시에 나갔는지를 물어보신다. 해당 학생이 얌전히 자리에 있는 경우야 상관없지만 아이가 아예 온 적도 없거나 하면 답하는 나 역시 심각해진다. 그러면서도 ‘에이 공부하겠다고 책가방 싸 들고나간 애가 가봤자 어딜 갔겠어.’ 싶다. 오히려 감시 수단이 있으니 더 불안한 것 같다. 그런 게 없던 시절에는 들키지 않으니 알아서 눈치껏 제시간에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됐는데, 이게 들켜버리니 사건이 되고 사고가 된다. 그냥 그날따라 탕후루가 땡겼거나 친구랑 잠깐 피시방에라도 가고팠겠지. 어디 가서 농구라도 한 판 뛰고 있겠지. 어떻게 그렇게 매일 공부하고 살아. 한창 호르몬이 날뛰고 기운이 넘치는 때인데. 오늘 하루 나들이 나갔다 왔으니 내일은 다시 돌아와 공부할 거야. 그렇지, 학생?
+그 영어 선생은 서너 달 정도 버티다 어느 날 사라졌다. 우리는 다시 영어시간에도 튀지 않고 얌전히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우리 때문에 잘린 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그냥 다시 그 좋아하던 강남으로 입성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