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몬스터>의 등장인물 룽게 경부는 사건 현장의 흔적을 보고 범인의 특징과 행적을 추리한다.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인간은 없으며,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악마다” 라고 말한다. 나는 스터디 카페에서 청소할 때마다 이 대사가 생각난다. 무인 운영하는 공간은 운영의 손길이 실시간으로 미치지 못하는 만큼 흔적 안 남기고 깨끗하게 가시는 손님이 최고니까, 악마여도 뭐 괜찮겠다 싶거든요.(<몬스터>는 유럽 냉전 시대에 태어난 연쇄 살인마를 쫓는 의사의 이야기를 그린 고전 명작입니다. 강추하고 싶지만 지금은 구할 곳이 없을 거 같네요. 나이대가 이런 데서 티가 납니다.)
스터디 카페라는 곳은 얌전히 와서 공부만 하고 사라지는데 무슨 치울 게 그리 나오는가 싶지만, 룽게 경부 말대로 인간은 결국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한 칸 한 칸 손님이 사용한 자리를 치우고 있자면 마치 과학수사대 CSI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이 동그란 물 자국은 오늘 차가운 음료 - 아마도 스무디류를 먹은 컵 자국이겠군. 여기 이건 손자국이구나. 이 얼룩은 손자국도 아니고 아마도 엎드려 잔 건가. 이 옆면에 튄 커피 물방울들은 보아하니 빨대로 튀겼겠구먼. 바닥의 이건 누군가 걸어가며 흘린 커피 흔적인 듯한데 이대로 따라가면 어느 좌석 누구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런저런 필기구 자국이야 뭐 공부하다 그랬으려니 한다. 이런 것들은 매직블록으로 문지르면 싹 지워진다. 책상 아래를 치우다 가끔 필담한 쪽지나 포스트잇을 보게되면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학생시절, 공부하다 나누는 필담이야말로 쫓기는 수험생 시기 소소한 재미 중 하나 아니겠는가. 친정집에도 그 시절 주고받은 쪽지며 교환일기 모아둔 커다란 박스가 있다. 그런데 문제집도 연습장도 아닌 책상에다가 필담을 나누는 것은 왜 왜 왜 하는 거니? 너네 오늘 중간에 저녁으로 뭐 먹으러 갔는지, 오늘 언제 집에 갔는지 아줌마가 치우다 다 읽었다.
머리카락도 어디에나 있다. 동물은 털을 뿜거든요. 승마하는 귀족들이 나오는 로맨스소설마다 왜들 그리 마굿간에서 말을 빗질해댔는지 몰랐는데 알고보니 말이 털이 엄청 빠지더라. 여학생들의 긴 머리카락은 툭툭 똬리를 틀고 떨어져 있어서 ‘이 자리는 여자 성별의 사람이 쓰고 지나갔습니다’를 확실하게 알게 해 준다. 딸 둘의 머리카락을 치우며 여자 셋이 한 집에 있으니 머리털이 끝이 없이 나온다고 매일 한탄하시던 엄마가 생각난다. 하지만 머리카락 뿜어내던 딸 둘을 치우는 데 성공하신 친정 엄마는 이젠 고양이 집사가 되어 고양이의 털을 또 매일매일 치우고 계시지요.
여학생 머리카락이야 뭐 나도 살며 평생 보던 거라 그러려니 하는데 남학생 머리카락이 책상 위 가득 떨어져 있을 때는 내가 괜히 심각해진다. 모근도 살아있는 짧은 머리카락이 여러가닥 흩뿌려진 책상이 자주 나오던 시기가 있었다. 이 학생은 탈모 유전자를 갖고 있는 걸까, 아니면 스트레스로 인해 원형 탈모가 온 걸까, 문제 안풀린다고 스스로 쥐어 뜯은 거면 십년 안에 후회할텐데. 우주로 관광도 가고, 길에는 전기자동차가 다니고, 상온상압 초전도체가 나오니 마니하는 이 시대에도 대머리는 아직도 약이 없는데 어쩌려나. 아줌마는 또 혼자 오지랖을 떨었다.
돈을 내고 들어가는 공간에는 타인의 손에 의해 정리 정돈된 모습을 기대한다. 호텔방이 그렇고 렌터카가 그렇고 영화관, 식당이 그렇다. 기존에 사용한 타인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공간을 바라며 돈을 지불한다. 그래서 무인 운영 스터디카페라 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정리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상주하지는 못하지만 틈나는 대로 가서 열심히 쓸고 닦고 알바도 쓰고 하며 현상 유지를 위해 노력한다.
지키는 사람 없어도 알아서 정리 정돈하고 깨끗하게 떠나 주시는 무인 스터디 카페 이용자 분들 모두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절대 악마 아니죠. 천사님이십니다, 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