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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 원장 Apr 04. 2024

박재혁. 다시 제주공항1번 출구...6

짝사랑과 불륜의 사선에서

제주섬에서 태백산이라는 이질적인 네이밍으로 건물전면에  I ❤️ JEJU 슬로건을 내건 숯불갈비식당 주차장에 내린다.

고기가 정갈하게 차려져 나오고,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에 고기가 익어가고, 에어컨바람을 무색하게 하는 그 열기에 내 얼굴도 달아오른다.


머리를 묶어 올린다.

무심하게 두 팔을 올려 머리를 뒤로 돌려 묶으면서 문득 부끄러운 기분에 창밖에 세워진 차들로 눈길을 돌린다.


이게 무슨 일인가?


눈감고도 묶어 올릴 수 있는 이 익숙한 동작을 하는 동안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어색함은 처음이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올려진 머리를 다듬을 틈도 없이 바쁘게 손을 움직여 무리하게 큰 쌈을 싸 입에 욱여넣고 무심하게 물도 마셔본다.

이 열기가 숯불 탓인지.. 뭔지. .


점심에 이어 이른 저녁식사까지.

두 번째 식사여서인지 긴장한 중에도 젓자락은 분주하고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25년 전 그의 퇴근길을 서두르게 했던 바로 그 두 딸의 장성한 이야기와 첫 째 딸이 내 아들이 지금 다니는 대학교 선배라는 것으로 이어진 자식이야기는 새삼스레 그가 한 가정의 아버지이며 남편임을 상기시키는 각성의 시간이면서도, 열심히 살아낸 그의 삶을 알수록 존경의 빛깔을 품은 금지된 마음도 커져갔다.


숯불이 잦아들고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이 임박한다. 배는 부른데 허기가 진다. 눈에 아쉬움이 비칠까  다짐하듯 몸에 힘을 주고 먼저 말을 꺼낸다.


W: 소장님, 이제 가야 할 것 같아요.

M: 어. 지영 씨. 이제 가자고. 공항에 태워줄게.


차에 올라 공항으로 향하는 길은 찰나와 같았다.

할 말이 이렇게 많았는데 어떻게 25년을 참았을까 싶게 차에서도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


M:지영 씨랑 같이 근무했던 여직원이 누구였는지

     지금도  기억이 안 나는데,

     지영 씨는 이름만  듣고 기억이 났다는 게

      신기하네.

     지영 씨가 이뻐서.. 기억이 남은 건가.


어렵게 말을 꺼냈을 그의 쑥스러워하는 말투에 괜스레 설레면서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차는 공항에 닿았다.

다시!!

제주공항 1번 출구다!!


비행기를 놓치고 싶었다.

놓쳤을까? 겁 없는 젊은 시절이었다면.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몸은 늙었고 늙음의 지표인 숫자는 차곡차곡 늘어나 중년의 자리에 섰지만, 여전히 나는 열여덟 살 소녀에 매여 있다.

그 소녀는 사랑을 잃고 아팠으며, 한가닥 혐오의 말로 스스로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다.


무너지지 않으려 사계절 내내 냉기를 품고 단단히 얼어있던 동토에 송곳처럼 꽂혀진 사람의 온기 한줄기가  얼음판 전체를 둘로 쪼갠다.

그의 따뜻한 단어, 느린 말투, 억양, 눈빛은 뜨겁고 뾰족한 송곳이 되어  예상치 못한 시점에  나를 녹여 쪼갠다.

정작 그 사람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하니,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하려 애를 쓴다.


그의 차에서 몸을 내린다.

그와 걸었던 수십 겹의 화산지층처럼 내 마음이 여러 갈래로 흘러 감정에 매몰될 듯 울렁거렸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와 다시 만날 명분이 없는 지금, 이 헤어짐을 성인답게 잘 마무리하는 것이 젊은 시절 존경했던 상사와의 추억을 잘 간직하는 오늘 내가 꼭 해야 하는 마지막 일이다.


의례적인 웃음으로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한다. 그가 차에서 내려 내게 걸어와 인사를 건넨다.


M:지영 씨, 잘 가요.

W: 예. 소장님. 건강하세요.


조금 전의 다정함을 털어버리 듯 과장되게 건조한 인사를 끝으로 돌아서 가려는 그를 불러  급히 손을 내민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뭐라도 해야 했을 열여덟 살짜리의 당돌함인지.

맞잡아 쥔 손을 크게 한번 흔들어 악수를 하고 그는 차에 오른다.


창문이 내려지고 그가 나를 보고 웃어 보인다.

나는 마지막 최선을 다해 무심하게 손을 흔들어 본다.


그의 차가 멀어져 간다.사진다.

패배감과 낭패감에 잠시 멍하다.

퍼뜩 정신을 추수리고 무기력하게  발길을 옮긴다.

그가 쥐어준 오메기떡상자의 무게를 느끼며 사람들 틈에 섞여 들어간다.

몸은 할 일을 하느라 분주하다.


면세점에서 와인과 위스키를 사고 빠르게 수속을 마치고 떠밀려 비행기에 올라 자리에 앉는다.


오늘 하루는 촘촘히 느리기도 송두리째 빠르기도 했다. 시간은 물리의 영역에서 벗어나 감각의 영역으로 측정된다.


비행기에서  멀어져 가는 제주의 불빛을 보고 는데 갑작스레  것이 아닌 것 같은 비통에 가까운 울음이 터져나온다. 몸이 떨리고  끝도 없이 눈물을 흐른다.


외로웠다.

그리웠다.

억울했다.


두 조각으로 쪼개진 언 땅아래 나도 알지 못하도록 숨겨두었던 두렵던 감정이 폭발한다.

비행기 안이 아니었다면 소리라도 지르며 통곡을 했을까? 어쩌면.

사람 하나가, 정작 본인은 알지도 못하는데.

그 사람 하나로. 나는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나약해졌다.

허물을 벗은 갑각류처럼 이제 무방비상태다.는.


애써 외면한 나 자신을 향한 연민,

나를 무너뜨릴 것 같아 꺼내놓을 수 없었던  연민이 눌려진 만큼의 힘으로 솟구쳐 분다.

화산섬 제주 상공에서.


내 삶이 억울했다. 너억울했다. 

그러나 억울함은 변명같았다.나는 변명이 싫었다.

오히려 처벌을 달게 받는 편이 나를 지켜내기에 수월했다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져 독해진 열 여덟살짜리는 칼바람속에 버티며 살아오면서 온기를 잊은 채  살다가

의도 없는 한 오라기 다정함에 이토록

쪼개졌고 무너졌다.


이제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지 두렵다.

제주는 저렇게 멀어지는데.


대구로 간다.오메기떡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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