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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 원장 Feb 23. 2024

박재혁.검은 우산_4

짝사랑과 불륜의 사선에서

[1.2.3편 요약]

25살, 대기업에 근무를 할 때,

대구공항 근처 지점으로 제주출신 과장님이 발령받아 오셨고, 그 기업의 천편일률적인 마초적 남자들과는 다르게 지성인의 면모와 따뜻한 성품과 말투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25년이 지나, 2023년 어느 봄날

[세이노의 가르침]을 읽던 중 11년의 직장생활동안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그분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25살 이후 25년은 이러하다.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혼했고, 이혼했고, 다행히 아들을 장성하게 키워내 서울로 대학을 보냈고, 10년째 영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위암판정을 받았고 지금은 위암수술 3년 차를 지나고 있다.


늘 죽음과 맞닿아 있는 나의 삶은 때로 그 취약성이 상식을 벗어난 용기를 불러온다.

망설임도 잠시, 공항 근처 지점으로 전화를 건다.


수소문한 지 10여 분 만에 제주에서 전화가 온다.


낮게 격앙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25년 동안 수면아래서 유영하던 기억들이 송두리째 수면에서 갑판 위로 올려진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펄떡이고 바다물고기의 비늘처럼 알알이 반짝인다.

새삼스레 나이를 잊고 그 시절로 돌아가본다.


그는 제주에서 세무사 사무실을 운영한 지 20년이 지나고 있고, 나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으며, 몇 번이나 내 이름을 불러가며 안부를 물어온다.


그로부터 더디 두 달이 지나고, 부가세 신고와 기말고사가 끝나서 둘 다에게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7월 5일 제주행 비행기에 오른다.


제주공항 1번 게이트에서 그의 차가 내 앞에 선다. 내려진 창문사이로 그가 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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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M:지영 씨?!


W:예!!! 과장님!!


붐비는 차들 틈에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대답과 동시에 차에 오른다.


더운 여름 공기에다 긴장한 탓에 몸이 덥다.


백팩을 앞으로 안고서 찰나의 순간, 핸들을 잡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내가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다.

60대 남자라면 배도 나올만하고, 머리카락이 성길 만도 하고, 얼굴에 주름이 깊을 만도 한데,


그는 풍파 속에서도 소나무처럼 청청했구나.


M:지영 씨는 그대로네.


W:그런가요? 과장님이야말로 변한 게 없으세요.

   제주를 진짜 오게 되네요. 과장님을 다시 뵙게

   될 줄 몰랐는데, 굉장히 어색하면서도 편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M:제주로 찾아온 여직원은 지영 씨가 처음이야,

     나도 이상해. 흐흐

     밥 먹어야지. 뭐 좋아해? 지영 씨


W:제주 왔으니 과장님 자주 가시는 곳, 어디든

     괜찮습니다. 저 다 잘 먹어요.


주차장에 내려 포석길을 따라 들어간 곳은 애월에 있는 유명한 인도음식점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커다란 난 한 장을 서로 양 끝에서부터 불규칙적으로 뜯어 커리에 찍어 입으로 넣는다.

손으로 먹는 음식은 서로의 경계를 허문다.

어떤 낯선 인연도 이 음식 앞에서는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가족이 될 것 같다. 난의 크기가 줄어들수록 대화가 깊어진다.


아버지로, 남편으로, 세무사로, 성당에 다니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의 긴 세월을 담은 이야기가 여름풍경과 아우러진다.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여름 정원의 푸르른 기세가 식탁에 와닿는 듯하다. 그 청명함은 겨울과 봄을 지나온 시간의 힘이리라.


어쩌면 이 두 중년처럼.


인생을 알지 못했던 풋내기 인생 초짜들이 가장 굴곡진 25년을 관통하며, 눈보라와 목마름과 모진 바람을 견디고 자란다. 마침내 힘껏 물을 머금고 강한 햇살을 만끽하며 잎을 넓게 펼쳐 바람 앞에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장성한 나무가 된 것은 다 세월의 힘이다.


그는 작은 체구와 달리 얼굴 표정은 단단하고 걸음에 결단과 계획이 묻어 있다.

왠지, 분명하게 나는 그게 느껴진다.


M:지영 씨, 어디 가볼까? 이제.


제주사람들은 스스로 섬안내자가 되나 보다.

자랑스러운 제주도민의 자부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다.


W:과장님, 아니 아니 소장님이시죠. 이제~~.

     사무실 들어가 보셔야 되는 건 아닌가요?

      괜히 저 때문에.


M:아니야. 렌트하지 말라고 한 건 나도 오늘

     지영 씨 핑계  삼아 하루 쉬려고.

     6월에 너무 정신없이 일만 했더니  힘들어.

      급한 일 있으면 전화 올 거야. 걱정 마.

       일단 카페 가서 차 한잔 마실까?


W:예. 좋습니다.


그의 오래된 고객이 얼마 전 개업한 애월에 있는 지중해풍 작은 카페다.

"아, 세무사님, 오셨어요?"

카페 여주인이 반갑게 그를 맞이하고 화들짝 놀라는 표정으로 나에게 눈길을 돌린다.


소장님이 서둘러 대답하며 나를 소개한다.


"개업 축하드립니다.

대구에서 근무할 때 같이 일했던 여직원이에요.

아메리카노 아이스로 두 잔 주세요."


커피를 받아 들고 함께 계단을 오른다.


나란히 붙은 창가 bar 테이블에 앉아 통창으로 바다를 보며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데 진짜 옛 친구를 만난 듯 편하고 마음이 녹녹해진다.


한편으론 카페주인의 시선이 신경이 쓰이는 건 내 자책이겠지. 여자 혼자 제주까지 남자상사를 만나러 오는 주책맞음을 스스로 알고 있지만, 막상 그를 만나고 보니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라는 욕심을 품게 된다.


통창으로 제주의 어촌풍경이 넓게 펼쳐진다.

제주토박이인 그는 어릴 적 집 앞에 있던 이호테우해변에서 바다수영을 하며 자랐다 한다.

거친 바다를 헤엄쳐서 오는 그의 어린 모습을 연상해 본다.


코난이 떠오른다.

(아니 아니 명탐정 코난 말고, 미래소년 코난.

아실는지?)

배의 방향타를 한 손으로 붙잡고 시선은 왼쪽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응시하며 다른 한 손으로 가드를 야무지게 잡아 몸을 낮게 지탱하여 곧 부딪쳐 올 큰 파도를 기다린다. 굳게 다문 입술과 차가운 눈빛이 환하게 웃던 소년이 맞나 싶게 믿음직스럽다.


그와의 대화는 긴장과 편안함의 파장이 겹친다.

그는 말은 느긋하면서도 명료하다.

직업적인 특성이 몸에 베인 것일까?

무표정하게 말하다가도 소년처럼 활짝 웃기도 하고, 수줍음을 숨긴 작은 미소를 입가에 보이기도 한다.


카페를 나서며,


M:수월봉 지질트레일 간 적 있어? 지영 씨.

W:아니요. 안 가 봤어요.

M:화산재 지층 보러 가 봅시다!!

W:예. 좋습니다!!


그의 계획에 설레는 맘으로 동참한다.


애월에서 제주 서쪽 차귀도까지 가는 동안 그의 핸드폰에 저장된  playlist 70,80년대  올드팝을 듣는다.


M:지영 씨는 어떤 음악 들어?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다.

내가 음악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자각하게 된다.


W:그러고보니 저는 음악 취향이 없는것 같아요.

      BGM으로  피아노연주를 듣는  정도가  다예요.

        소장님 취향대로 음악 틀으셔도 됩니다.

        어떤 음악 들으세요?


그래서 듣기 시작한 올드팝들에 맘을 빼앗긴다.


the way라는 곡의 멜로디가 익숙하다.

where were they going without ever knowing the way? 

(그들은 길도 모른 채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수월봉 바로 아래에 주차를 하고 조금 올라가니 전망대가 나왔다. 와서 보니 여기는 첫 제주여행 때 아들과 낙조를 보러 왔던 장소였다.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그때보다 한산하다. 새로운 핫플에 밀려 이곳은 이제 뜨거움이 식어 사람의 체취보다 자연이 그 자리를 온전히 채우고 있었다.


바로 한눈에 차귀도가 보이고  해변으로 늘어선 풍차가 느리게 돌아간다.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닿은 수평선이 길게 그어져 있다.

바람이 제법 분다. 7월의 바람이라 덥고 습하다.

한참을 같은 바다를 나란히 바라보고 서 있는다.


M:지영 씨, 사진 찍어줄게.


W:아~~ 네. 그.


그는 제주에 놀러 온 지인들을 위해 사진을 찍어주는 것에 익숙한 것인지, 당황하는 나와는 달리 자연스럽게 내 폰을 받아 카메라렌즈로 나를 본다.

당혹스러웠지만, 애써 무심함을 연기하며 렌즈를 향해 웃어본다.

그 렌즈 뒤에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을 연상하니 오금이 저려온다. 몇 초가 영원 같다.

(나중에 그 사진은 오래도록 큰 행복을 주었다)


M:지영 씨, 조금만 내려가면 지질트레일 해변이야.

        근데 발은 괜찮겠어?"

원피스를 입고, 맨다리에 여름 샌들을 신고 길게 자란 풀들을 지나 걸어오는 나를 보고 소장님이 망설이며 말을 건넨다.


W:괜찮아요. 소장님

덧붙일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고마운 맘과 달리 대답이 짧다.


햇살이 뜨겁다.

지질트레일 해변에 가기 전에 그가 트렁크에서 커다란 검정 우산을 불쑥 꺼내 든다.


커다란 우산이 자동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후욱 소리를 내며 화~~ 왈 ~~ 짝 펼쳐져 하늘을 가린다.


우산 아래 그와 바싹  다.


다음회=>담주 화요일 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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