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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 원장 Feb 26. 2024

박재혁,한여름의 스노우볼_5

짝사랑과 불륜의 사선에서

오늘은 2024년 해를 넘어 2월이다.

나는 작년 7월의 그날의 해변을 매번 현재시점으로 걷고 또 걷는다.


나는 외로움을 크게 느끼지 않는 편이다.

마음을 나누는 여닐곱명의 친구로 충분히 따뜻하고, 이혼 후 남자라면 더더욱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 혼자서도 하루 일과를 재미와 보람으로 꽉꽉 채울 수 있다.


월 평균4권의 책을 일고  모임참여 전 홈페이지에 매번 독후감을 올린다.

북리뷰 블로그를 운영하고, 인스타도 시작했다.

본업은 영어학원이라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 제법 긴 시간 준비가 필요하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낸다.

그리고 일요일은 교회카페에서 커피를 내리며 봉사하고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곧 군대를 준비하는 아들은 상남자지만 나에게만은 여자아이처럼 살갑게 대하고 가족애가 깊다.


외로움이 넘 볼 수 없는 견고한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외로움이란 것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7월 5일 제주발 밤행기안에서 처절하게 깨달았다.


후~욱 하고 펼쳐진 검정우산이 해를 가린다.

우산아래 공기가 정체된다.

공기 속으로 몸을 넣는다.

정체된 공기가 덥다.


그가 팔을 길게 뻗어 손잡이를 잡은 탓에 그의 한쪽 어깨만 우산이 만드는 그늘 아래 있다. 그럼에도 내리막 길이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의 어깨가 내 어깨에 부딪혀온다.


놀란 두 어깨는 후다닥 멀어져 우산 아래 공간을 만들어 내고, 멀찍이 떨어져 다.


겹겹이 쌓여 크레페케이크의 단면 같은 화산절벽이 오른편으로 길게 내리막길을 만들고, 왼편으로 검은 바위에 파도가 부서진다.


여름이라 걷는 사람이 드물다.


정체된 더운 우산아래 그가 말을 걸어온다.


M:좀 덥지? 조금만 걷고 차로 가자고.

W:괜찮아요. 여기 좋은데요.제주섬 전체가 이런 지층으로 만들어진 거라니 신기해요. 돌멩이들이 날아와서 박힌 채로 은 거 좀 보세요.


가이드와 관광객 모드에 몰입해 본다.


다시 그의 걸음이 가볍다.

나도 절벽과 바다를 번갈아 보며 가이드님의 안내에 흡족함을 드러낸다.


얼마가지 않아 내리막이 끝나고 절벽이 안쪽으로 패인 넓은 곳이 나온다.

그곳에 작은 갱도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 공세에 맞서 일본군이 만든 방어진지라고 안내문에 적혀있다. 앞장서 가는 그를 따라 작고 밀폐된 갱도 안에 들어간다. 공기가 금세 서늘해진다.


왔던 길을 되돌아 차로 가는 길에 그가 우산을 접어 내게 건네준다.


M:나 화장실 좀,,

W:아 네. 다녀오세요.


바다와 마주한 간이화장실 앞에서 접힌 긴 우산을 들고 그를 기다린다. 남자화장실 앞에서.


무한히 어색하다가도, 돌연 갑자기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혼자 남겨지고 보니 선명한 직감으로 예측된다.

오늘이 후에 사건이 될 것 같은.


손에 들려진 검정우산을 내려다본다.

그의 것이다. 내 손에 들려져 있다.


그가 화장실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우산을 다시 가져간다. 그가 오고 우산은 가 버렸다. 그 우산에게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을 지경이다. 내 것을 뺏긴 것 같은 억울함이 잠시 머문다.

내가 뺏긴 건 우산인가 또 다른 어떤 것인가.


지금도 트렁크에서 그의 손에 들려 비를 막거나 해를 막는데 줄곧 쓰이고 있을 그 우산아래 다시 서는 시간이 허락될까?


차로 돌아와 에어컨 바람에 땀을 식힌다.

시원한 바람에 이성이 돌아온다.


M:잠시 걸었는데도 힘드네.


W:저도요. 그래도 경치는 너무 훌륭했어요.

     자!! 소장님. 이제 어디로 가게 되나요?


다시 기운을 차리려 애쓰며 톤을 높여 내가

대답한다.


M:한 군데 더 보러 갈까 했는데,

     지영 씨 지친 것 같아서 공항 근처

     밥집에 좀 일찍 가서 느긋하게 식사하고

     공항까지 태워줄게.

     식당까지 가는데 시간이 좀 걸리니까

     지영 씨 시트 뒤로 살짝 눕혀서 한숨 자.


그의 목소리에 습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나 이성적이면서도 배려가 있고

따뜻하면서도 냉소적인 이 말들과 말투를

고스란히 설명할 길이 없다.


W:예? 그래도 되는 걸까요?

     소장님도 피곤하실 텐데, ,


M:괜찮아, 괜찮아.

     지영 씨 듣고 싶은 음악 있어?

W:저 소장님 올드팝 좋아요.


몇 조각 기억으로 25년 만에 만난 그는 오히려 낯설다. 그저 나이 든 상사였어야 하는데 그는 자꾸 낯설다. 낯설어서 큰일이다.


차가 출발한다.

이후 30분간은 누군가 흔들어 놓은

마법가루가 쏟아지는 노우볼 안으로

들어가 있는 듯 하다.


에어컨 바람이 솔솔 얼굴에 닿고

차로 들어온 햇살은 한풀 꺽여 오히려 따사롭고

올드팝이 가득히 조용히 둘러싸는 차 안은

잠시 무중력의 무지개빛 비누방울 안이다.


노곤한 꿈같은, 아스라이 환상 같은

공간, 그 시간은  평생 선명하게 새 있을 것이다.


요란하지 않은 위로가 내 모든 과거를 치유해준다.

안간힘으로 긴 터널을 빠져나온 숯검댕이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누군가의 선물 같은 시간이다.


나는 그 속으로 빗장을 풀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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