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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해야 Johaeya Oct 26. 2023

미술 학원에 가고 싶어요

[개똥철학] 2편 _자욱한 시간 속 선명했던 물건 하나




     여섯 살이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 들어가기 전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기억이 자욱해서 쉽게 떠오르지 않지만요. 오빠 둘을 유치원에 보내어 보니 딱히 막내(나)는 유치원에 보낼 필요가 없다고 아빠는 판단하셨대요. 당시에 개인택시 운전사였던 아빠와 엄마는 새벽이면  나가시기 바빴다는 것, 오후에 동네 아이들과 개울에 모여서 물장구를 치던 것, 부모님이 퇴근길에 가져온 '투게더'(아이스크림)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삼등분하느라 삼 형제가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있던 것, 두 분이 동시에 운전을 쉬는 날에는 아빠의 택시 트렁크에 빈 물통을 싣고 온 식구가 약수터로 출동하던 것, 그리고 가끔은 사는 일에 지친 아빠와 엄마가 부부싸움을 하던 소리가 기억나요.


어린 시절을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반대로 기억의 화질과 음질이 왜 이토록 낮은 걸까, 의문이었어요. 그런데요, 유일하게 딱 한 가지는 생생해요. 올해, 이번 달, 바로 오늘 겪은 것처럼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일 말이에요. 그날의 날짜와 날씨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일이 남긴 감정은 수십 년이 지나도 그대로일 정도로 '어느 소심한 아이에게 벌어진 조용한 사건'이라고 할까요. 평생 가족과 친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 <자욱한 시간 속 선명했던 물건 하나>에 대한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외갓집은 벚꽃 만발로 유명한 도시, 진해에서 점빵(작은 슈퍼)을 운영했어요. 맞벌이를 하며 삼 남매를 키우느라 부모님은 숨이 턱에 찼을 거예요. 언제부터인가 저 혼자 외갓집에 맡겨졌어요. 점빵을 돌아다니면서 뽑기와 불량식품을 구경하느라 즐거워는 아이가 보이네요. 외할머니는 다정했고, 외할아버지는 무뚝뚝했어요. 세 살 때였나, 엄마가 저를 외갓집에 맡기고 일을 나가셨는데 아이(나)가 사라졌다고 해요. 엄마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다가 저녁나절에 아이를 찾았는데 아이는 집마당 뒤편에 웅크리고 앉아서 "엄마~"하고 작게 부르고 있더래요. 상처 난 얼굴에 피가 흐르는 채로요. (오른쪽 눈 옆에 난 상처는 아직 옅게 남아 있답니다.) 저는 그날이 기억나지 않지만 밥벌이하느라 아이를 가까이에서 돌보지 못한 엄마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싶어요. 그렇게 아이는 네 살이 되고, 다섯 살, 여섯 살을 먹었겠죠.


외할머니 동네에 친구가 생겼나 봐요. 이름도 얼굴도 희미하지만 둘이 껌처럼 붙어 다녔을 거예요. 친구가 먼저였는지, 제가 먼저였는지 순서는 모르겠어요. 우리는 그림 그리기가 너무 재밌다고 했어요. 아마도 그날이었겠죠? 그 친구는 부모님에게, 저는 외할머니에게 말했어요.



미술 학원에 가고 싶어요.



라고요. 외할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요.



"미술 학원에 보내 주세요."



그리고 며칠 만에 드디어 할머니가 답하셨죠.



"그래, OO(친구)이랑 같이 가거라."



다음 날 친구랑 두 손을 꽉 잡고 학원으로 달려갔어요. 키 작은 의자에 둘이 앉아서 학원에 스민 크레파스와 물감 냄새에 몽롱해져 있는데 우리 생애 첫 선생님이 큼직한 무언가를 책상에 올렸어요. 샛노란 학원 가방인 거예요!


'우아~' 하고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선생님 앞으로 두 손을 내밀었어요. 두근거렸어요. 우리 둘 다 가방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거든요.


두근거렸어요

     





"선생님."


"응?"


"가방… 내 가방……"


"그건 네 할머니한테 물어봐."



친구와 신나게 내리막을 달려서 학원에 왔는데……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앞서 가는 친구가 빳빳한 노란색 학원 가방을 앞뒤로 신나게 흔들었어요. 그리고 그 뒤로, 아이는 빈손으로 반원을 그리며 오르막을 올랐죠.



할머니. 나는 가방이 없어요.



울상인 손녀에게 외할머니는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어요.



"한 사람 학원비만 냈어. OO(친구)이랑 너랑 한 달에 반씩 나눠서 그림 배울 거야."



학원비가 부담되었던 친구의 부모님과 외할머니가 한 사람 치의 학원비만 내고 친구와 저를 미술학원에 등록한 것이었죠. 외할머니가 낸 학원비가 적었던 것이지 아니면 친구의 부모님이 학원의 미래에 더 큰 영향력?을 품은 것인지, 아무튼 1+1에서 분위기 상 '+1'을 담당한 저는 그 사실도 모른 채 학원 선생님 앞에서 입을 함박만 하게 벌리고 가방을 기다렸던 거예요.


      




그림을 그리러 가는 길이 신나지 않았어요. 학원에 오갈 때마다 친구의 팔에 달려서 춤추는 노란색 가방이 부러웠어요.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도 즐겁지 않았어요. 선생님의 눈과 마음이 친구의 그림에만 머무는 것 같았거든요. 크레파스를 쥔 손가락이 못생겨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수업이 끝나면 오늘도 집가는 길에는 나만 손이 비었을 테니까요.



'엄마가 오면 나도 가방을 갖고 싶다고 말할까?'



하다가도,



'나는 엄마 말씀 잘 듣는 아이니까. 착한 아이는 참는 거야.'



엄마에게 조르지 않고 가방을 포기하기로 했어요. 내가 참으면 엄마 아빠가 덜 힘들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그림을 그리러 학원에 갔죠. 하지만 크레파스를 쥐어도 물감냄새를 맡아도 설레지 않았어요, 그림은 가방으로 그리는 것이 아닌데. 외할머니한테 학원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그림이 싫다고요.  




   


그렇게 생애 첫 선생님과 헤어지고 난 이후, 학교에 들어간 아이(나)는 '선생복福'을 줄줄이 맞이하게 돼요.



색 바랜 흰색 러닝셔츠 차림으로(하의는 회색 정장바지였어요) 수업에 들어오시던 <한문 선생님>이 계셨어요. 어느 날 학생들에게 자기 이름을 한문으로 써보라고 했어요. 선생님은 수업 시간 내내 교실을 어슬렁거리다가 종이 치기 직전에 학생들이 써 놓은 한자를 한 사람씩 재빨리 확인했어요.

한여름이었어요. (50대 중반의 남자) 선생님이 허리를 숙였다 펼 때 러닝셔츠 사이로 선생님의 젖꼭지가 어른거렸어요. 아이(나)의 자리까지 가까워지는데 가운데 한자가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천자문에도 없는 귀한 한자라며 딸의 이름을 직접 지은 아빠의 자긍심에 먹칠을 하는 순간이었요. 떠올리려고 할수록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마침내 선생님이 아이의 자리 앞에 섰어요, 비어 있는 가운데 한자…… 선생님은 시원하게 아이의 뺨을 후려쳤어요! 아이는 참았어요. 제 이름도 한자로 못 쓰는 바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키 크고 당차던 <영어 선생님>은 아이를 참 아꼈어요. 아이도 선생님이 마음에 들었죠. 아이의 눈에 선생님은 마치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마주한 다른 행성의 말을 하는 외계인 같았어요. 1년 담임이 끝나고 선생님과 헤어졌지만 영어 시간에는 선생님과 계속 만났어요.

왜인지 학년이 오를수록 아이의 성적은 떨어졌어요. 시험 기간이 끝나면 선생님은 영어 시간마다 아이를 호명해서 자리에서 일으켰죠. 그리고 떨어진 전교 석차만큼 아이에게 창피를 줬어요.(영어 성적은 최상위였어도요.) 그럴 때마다 아이는 참았어요. 영어를 좋아하는 마음을 전과목 등수로 증명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번에는 동글동글한 몸과 얼굴을 한 <프랑스어 선생님>을 만났어요. 보다 더 희한한 말을 하는 외계인이 나타난 거죠. 즐거웠어요. 수업 시간이 기다려지고, 프랑스어 성적도 좋았어요. 하지만 여전히 영어를 좋아하는 마음이 컸어요. 학교에 원어민 교사가 없던 시절이었어요. 야간자율학습에 빠지고 저녁에 학원에 가서 영어를 배우겠다고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어요. "너만 야간자율학습에 빠지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외국어 학원에 다니다가 수능을 망치면 네가 책임질 거냐!"라며 소리를 지르셨어요.

담임 선생님 바로 불어 선생님이었죠. 나를 위해서 내린 선택인데 당연히 지지해 줄 거라고 믿은 외계인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죠. 이번에도 참았어요. 아이는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거든요, 그건 감히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한 나쁜 학생이라는 뜻이었죠.

 

선생복福이 구름에 줄 단 듯





그렇게 무슨 일이든 '잘 참는 아이'는 엄마 아빠가 일을 나간 사이에 교통사고를 당해도 부모님이 힘들 까봐 말하지 않고 옆집에 숨어 있어요.(두 번이나요.) 역주행한 차량에 부딪친 몸이 붕 떴다가 추락해도, 초록불인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불법 주행 차량에 발이 깔려도 그랬어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지내던 시절의 일이에요. 어느 날 배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웬만하면 가지 않는 병원까지 찾죠. 의사는 배탈이라고 했어요. 며칠이 지나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배를 움켜잡고 구부린 몸을 질질 끌고서 강남터미널로 갔어요. 간신히 고향에 도착했죠. (기억으로는 총 7시간 반이 걸렸요.)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괜찮다고 말했어요. 병원에 가서 주사도 맞고, 약도 먹었으니 나을 거라고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상태가 그대로였어요. 그래도 괜찮다고 말했어요. 당시에 장사를 하시느라 바쁜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고 아빠가 아이를 일으켜 세웠어요. 병원에 가자고요. 고향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갔어요. 아이는 제 발로 응급실에 걸어 들어갔죠. 검사를 마치고 의사가 말했어요. 어서 휠체어에 앉으라고요. 맹장이 터진 X–ray 속 복부는 온통 뿌옜어요. 복막염 수술을 받았어요.



학업에 실패하고, 연애에 망하고, 꿈이 망가졌을 때에도. 도시 생활을 접고 공장에 들어갈 때에도. 이혼 후 강아지와 단 둘이 섬에 올 때에도. 언제나 아이는 참았어요.


참음,을 모으면 무엇이 될까






     바로 한 달 전이었요. 절친한 동생이 <그림 카페>에 가자고 연락이 왔어요. 음료를 시켜 놓고 그림을 그리면서 자유로이 시간을 보내는 곳이더군요. 그 순간 '샛노란 미술 학원 가방'이 떠올랐어요. 자욱한 시간 속 몹시도 선명한 물건 하나가 아이의 기억을 두들겼어요.


'나는 가방이 없어…… 나만 가방이 없어…….'


동생에게 <그림 카페>에 가겠다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어요. 여섯 살 이후로 아이에게 '그림'이란, 그리고 안 그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가방이 없어서 '가지 못한 곳'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자라면서 끄적인 그림들은 가능한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고 숨겼어요. 그런데도 어쩌다 아이의 그림을 보게 된 이들은 모두 아이의 그림을 칭찬했죠. 아이는 그 말을 절대로 믿지 않았어요.


그리고 36년이 지났어요. '그림을 그리는 곳'에 들어섰어요. 종이를 만지고 펜과 물감 냄새를 맡았어요. 오늘은 미술 가방 없이 이곳에 들어온 거예요.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분이 아이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었어요. 아이는 선생님에게 진짜 그리고 싶은 것을 보여 드렸죠. 바로 '샛노란 미술 학원 가방'이요. 줄을 긋고, 색칠을 하고 하나씩 하나씩 선생님을 따라 했어요.

선생님이 떠나고 이제 혼자 남은 시간, 아이는 종이에 그린 가방을 뚫어져라 쳐다봐요. 이제야 "내 가방"을 들 수 있게 되었어요. 가방을 가슴에 안다가, 앞뒤로 신나게 흔들다가, 머리 위에서 멈출 거예요. 벌어손잡이 사이로 그동안 선생님께 못한 말들이 공중에서 후드둑 다 쏟아질 때까지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가방이 없어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던 아이는 덕분에 글자로 이야기를 그릴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답니다. 당신은 어떤 노인이 되었나요?


노란색 물감이 어디에 있더라






⚶개똥도 약에 쓰이는, 우리 집구석 철학⚶

섬이 학교가 되고, 우리끼리 스승이 될 수 있는. 산책이 순례가 되고, 개똥으로도 깨칠 수 있는. 가방이 없어도 그리고, 그릴 수 없다면 쓸 수 있는.

참음을 모아 화병火病이 아닌 화병花甁을 빚어서 우리는 날마다 꽃을 꽂는다.
우주에서 딱 하나, 우리집 샛누런 물감


(*엄마가 이 글을 보지 않기를. 울지 않기를. 평생 모르기를.)






❙ [개똥철학]은 총 50편으로 주 1회 이상 업로드됩니다. (연재 요일 및 시간은 회사 사정과 상사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 점 양해 바랍니다.)

❙ 작가의 새 글은 <구독・하트・댓글> '3종 세트'로 생겨납니다. 즉 뭐라도 흔적을 남겨주시면 (안 먹어도) 쓸 기운이 난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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