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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해야 Johaeya Oct 09. 2023

죽을 때까지 OO 하라는 팔자

[개똥철학]1편 _할아버지의 창고



     보름 전이었어요. 추석을 목전에 두고 집주인 댁을 찾아갔습니다.


작년 겨울, 저는 개 두 마리(들개와 노견)와 지낼 곳이 절박했어요. 이런저런 일로 만신창이 되었던 몹시도 어려운 시기였죠. 당시에 집주인 어르신을 만나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구했고, 집은 집주인 어르신의 어머니가 홀로 사시다가 돌아가신 후에 수개월 비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처음 만난 집은, 낡고 서늘했지만 발을 들이기에 시릴 정도는 아니었어요. 수리가 필요한 부분을 감안해서 어르신은 첫 해 연세(일 년치 월세)를 받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옛날 창틀은 새것으로, 거실에는 중문까지 설치해 주셔서 덕분에 외풍이 심한 옛집에서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었습니다.  



책을 만들 거예요.



마음을 추스르고 어질러진 상황을 정리하자 해야 할 일이 떠올랐습니다. 자르기 직전의 판 두부처럼 바닷가 마을이 온통 하얗게 흐물거리던, 막 큰눈이 내린 겨울 아침이었어요. 이 집에 살았던 할머니에게 저도 모르게 불쑥 새해 다짐이 튀어나온 거죠. 그날 이후로 오늘 쓰게 될 이야기와 어떤 책을 만들지 매일매일 들려 드렸습니다. 듣는 이가 있다는 확신도, 의심도 없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어요.


             




     겨우내 시작한 책 만들기는 여름의 끝자락에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작업하는 동안 동시에 집 한편에 있는 아주 작은 창고방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북향에, 사람 둘이 들어가기에도 비좁은 허름한 공간이었어요. 처음에는 쓰지 않은 물건들을 놓았다가 어느 순간 물건들을 도로 꺼내어서 벽장으로 옮겨놓고 그 공간을 꾸미기 시작했어요. 10개월 동안, 끊임없이 혼자서, 꼼지락 거리면서 말이죠. 그건 좁고 벽이 바랜 방에서 이상한 빛을 보았기 때문이었어요. 죽어 있는 곳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화려하게는 못해, 이곳은 생기 있는 방이어야만 했어요. 구한 나무를 쪼개서 책장을 만들고, 별빛이 들도록 조명을 달고, 아끼는 테이블을 놓고, 마지막으로 테이블 위에 직접 완성한 책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서 <한사람 책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주위에 소식을 알렸어요. 늦여름 책방에 다녀간 손님들은 저만큼이나 마음에 들어 하더군요. 뿌듯했어요. (*8월 말, <출간 소식> 때 '책방' 소식도 함께 전했었는데 그때 보신 분들 계시?)  



<한사람 책방>의 '꼬물꼬물' 변천사



한겨울 허락해 주신 '소중한 글집'…
부지런히 쓸고 닦으며 좋은 글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집주인 어르신이 좋아하시는 커피와 직접 만든 책 두 권을 전하면서 명절 인사를 렸습니다. 때마침 긴 연휴를 앞두고 과수일을 쉬시던 날이었어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마당에 퍼더버리고 앉아서 어르신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젊은 시절, 배 타던 이야기, 40년 농사일……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뼈를 갈았던 지난 세월을 듣고 있자니 부모님 생각이 나서 자꾸만 울컥하는 거예요. 뜬금없지만, 지금 제 나이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라고 어르신께 여쭸어요. 돌아온 대답은, 난 열 배 백 배 더 모험할 거라(야)!, 였습니다. 어르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죽 들은 지금, 제 눈에는 충분히 용기 있고 멋있는 이셨는데 말이죠.


내년에는 싱크대를 교체해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사는데 불편한 것이 없냐고 물으셨어요. 오래되어 삭은 건 맞지만 아직은 더 쓸만하니 그대로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르신께 카드 한 장을 내밀었어요. 창고방을 꾸민 지금의 '책방' 모습이 담긴 카드였죠. 책작업을 하면서 함께 완성한 책방인데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고요, 여름 폭우를 견디지 못하고 옛날 창틀로 비가 새어 들어와서 이 방의 창문만 교체해 주시기를 부탁드렸어요.(지난겨울 창문 공사를 할 때 창고는 건들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어르신의 입이 열리지 않고……

카드만 바라보시는 거예요……

책방만요…… 책방만……               



그리고 어르신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어요. 왜 그러시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희한한 기분에 저도 덩달아 눈 속이 일렁였죠.




이 방…… 창고 아니라(야). 부모님 살아계셨을 때 아버지 책방이었어. 그냥 책방이 아니고 소중한 책들이랑 제일 아끼는 물건들 넣어두고, 열쇠로 꽁꽁 잠그시고는 남에게 절대로 보여주지 않던 아버지만의 보물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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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어 초라했던 창고가 아버지의 책. 방.이었다니요. 85세까지 바당에서 물질을 하시던 어머니보다 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보. 물. 창. 고. 는 어머니가 90세 되던 해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 상태였다고 해요. 그리고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의 유품과 아버지의 보물창고도 완전히 정리가 되었고, 그렇게 낡은 창고의 모습으로 저와 만난 것이었죠.



저도 집주인 어르신도 한참이나……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당에서 가을바람을 맞았습니다.


어르신께 전한 <한사람 책방> 카드






죽지 않으려고 살았고, 쓰고 싶어서 멈춘 적이 없었어요.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나를 안아준 함께라는 기운, 위로라는 빛.

당시에는 제게 소홀하고, 제 물건을 함부로 다룬 이들 때문에 상심을 겪고 있을 때였죠. 그런데 반대로 저는 상대가 소중히 여긴 것(장소) 인지도 모른 채로 10개월 동안 만난 적 없는 이의 것을 애지중지하고 있었던 거죠. 얼마나 귀여웠을까 싶어요. 저를 구해준 것이 옛집뿐만 아니라 이 집에 먼저 계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니 입꼬리는 올라가고 눈에서는 뚝뚝 그리움이 떨어졌습니다.(집주인 어르신도 마찬가지였어요.)


아, 명절 직전에 일어난 일이 또 하나 있었답니다.

혼자 힘으로 책을 출간한 지 한 달. 출판∙인쇄사로부터 채용 연락을 받았습니다. 경력이라고 할 것도 없이 제가 만든 두 권의 책을 보여드린 것이 전부였어요. 10년 동안 밥벌이로 삼던 업종을 걷어차고 이번 가을에는 '모험'을 시작한 거죠. 첫 출근 날, 사무실에서는 9년 동안 해온 일(북디자이너)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곧 퇴사를 앞둔 직원이 저를 '안타깝게' 맞이해 주더군요. 괜찮았습니다. 적어도, 40년이 지난 어느 날 "난 그때 용기를 내서 모험을 했었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숨막히던 유니폼과 구두 대신 헐렁한 일상복에 운동화를 신고 종이 냄새를 맡으며 인쇄 기기들을 지나거나 컴퓨터의 편집 화면과 눈을 맞출 때마다 가슴이 뛰거든요. (지금은 그래요.) 마치 지난겨울에 만난 보물 책방이 '너는 올겨울에도, 내년에도, 계속해서 글을 쓰고 책을 만는 사람일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요.


아 참, 긴 연휴가 끝나고 일주일이 안 되어서 그저께 집주인 어르신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책방 창틀에 비가 새어 들어오면 큰일이니 이중창으로 바꿔주시겠다고요. 지난 겨울 공사 때 왜 그 방을 빠뜨렸는지 한탄하시던 모습에 웃음이 났죠. 그리고 (기어이) 싱크대도 새것으로 교체를 해주시겠대요.



아무래도 저…… 죽을 때까지 책방(에서 글쓰기)하라는 팔자가 맞겠죠?



통화를 마치고 바로 다음날인 어제 아침에 견적을 보러 어르신이 저희 집에 들르셨어요. 혹시 기억나세요? [호구]에 등장했던 "주물 숟가락"을 어르신께 드렸습니다. 겨우내 글을 쓰던 어느 날 싱크대 선반에서 툭 떨어졌던 숟가락…… '밥 굶지 말고 쓰라'할머니의 목소리 같아서 기름칠하고 광을 내서 그동안 책방에 두고 내내 힘을 얻었었죠, 할머니의 유품은 마침내 그분의 아들인 집주인 어르신의 품으로 고이 돌아갔습니다.

'밥 굶지 말거라' 하던 할머니의 주물 숟가락




찬바람이 불어요.

배부르고 따뜻한 겨울이 되기를

<한사람 책방>에서 당신만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할게요.   






⚶개똥도 약에 쓰이는, 우리 집구석 철학⚶

우리집 인간은 빈방에서 말을 한다. 답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방에서 나오면 인간의 얼굴은 밝다. 꼭 그 속에서 누군가와 즐겁게 머물렀던 것처럼.

가을바람을 가르며 한 시간째 마을을 돈다. 돌다가 돌다가 우리는 달을 만난다. 달에서 사라진 해를 느낀다. 떨어져 있어도 하나로 보인다면 그것이 우주. 가을 밤바람이 구석구석 살갗을 지난다. 인간의 꿈도 빈틈없이 삶에 닿는다. 그렇게 산 것과 죽은 것은 '우리'를 이루어서 '영원'이 된다.  
[개똥철학]의 창시자, 제주 망펜하우어 '망고'

(*책방 변신에 꾸준히 도움을 주신 '라라벨'님, 모델에 흔쾌히 응해주신 '아온파'님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개똥철학]은 총 50편으로 주 1회 이상 업로드됩니다. (연재 요일 및 시간은 회사 사정과 상사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 점 양해 바랍니다.)  

▎작가의 새 글은 <구독∙하트∙댓글> '3종 세트'로 생겨납니다. 즉 뭐라도 흔적을 남겨주시면 (안 먹어도) 쓸 기운이 난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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