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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바람'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읽고

by 임가영

벚꽃이 흩날리던 4월의 어느 날 무심천을 걸으며 문득 이런 상상을 했다. '인터뷰를 하다 정말 한눈에 반할 멋진 인터뷰이를 만나면 어쩌지? 난 가정이 있는 유부녀니까 속으로 잠시 흠모만 하다 말아야겠지? 연락을 해오면 어쩌지? 어떻게 거절을 하지?' 일어나지도 않을 1,2,3의 경우의 수를 상상하며 벚꽃 길을 걸으며 김칫국을 마시다 그만 배시시 웃고 만다. 혼자 상상하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그 언젠가 이런 발칙한 생각을 진지하게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충북에 국한됐던 나의 취재 바운더리에선 b를 능가할 만큼의 매력적인 인물은 만나지 못했다. 아니 제눈에 안경이다란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래도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서 불륜이 나오면 b에게 눈을 흘기며 "만약에 너 엉뚱한 짓 하면 죽는다"라며 엄포를 놓는다.

첫 장부터 마지막장 382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의 모든 내용은 주인공인 레오와 에미의 이메일로만 이루어졌다. 글 말미 에미의 남편인 베른하르트 로트너의 장문의 이메일이 등장해 극적인 요소를 더하긴 하지만 글은 지극히 레오와 에미의 이메일 대화로만 펼쳐진다. 2006년 독일 도서상 후보, 독일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오른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이 책은 소위말해 유부녀와 미혼남의 인터넷 사랑이다. 별문제 없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유부녀 에미는 잡지 정기구독을 취소하기 위한 이메일을 엉뚱하게 레오에게 보낸다.

1월 15일 제목 :구독 취소
정기구독을 취소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이메일로 취소 신청을 해도 되겠지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E. 로트너

3번의 구독 취소 요청 메일에 레오는 에미에게 답장을 보낸다. 읽는 내내 조급증에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그리고 본인은 유부녀라면서 레오에게 사랑을 찌질하게 구애하는(내가 보기엔 아무리 사이버 상이지만 좀 진득하니 답장을 기다릴 줄 알아야지 낮이고 밤이고 메일에 목매는 꼴이란..) 주인공이 처음부터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본인은 별문제 없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며 총각인 레오에게 추파를 던지는 꼴이란... 중간에 책을 몇 번 덮을까 하다가 묘하게도 이들의 이메일 대화에 자꾸만 신경이 가는 걸 보면 소설의 덫에 걸린고 만 거다. 극적인 진전이나 변화 없는 이들의 이메일 대화가 대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궁금했고, 유부녀와 미혼남이라는 설정, 서로가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이메일이란 사이버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특성, 이를테면 본인이 대면하지 못한 상대방에게 갖는 에로틱한 환상, 컴퓨터 자판을 통해 표출되는 인간의 이중성, 더욱 대담해지고 거침없는 표현을 절제 없이 쏟아내는 인간의 본능과 욕구, 남녀 사고방식의 극명한 차이 등은 처음 가졌던 이 소설에 대한 별로였던 마음도 점점 흥미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바보가 아니라면 다 알아차릴 정도로 유별나게 레오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 에미의 바람을 알아차린 남편은 몰래 에미의 이메일을 훔쳐보고 레오에게 편지를 쓴다.


존경하는 라이케씨, 많은 고민 끝에 이렇게 메일을 드립니다. 고백하건대, 지금 이 메일을 쓰기가 많이 망설여지고, 한 줄 한 줄 쓸수록 자처한 이 당혹감이 커질 것 같습니다. 저는 베른하르트 로트너입니다. 제 소개를 더 자세히 할 필요는 없는 줄로 압니다. 라이케씨, 제가 어려운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부탁이 무엇인지 말씀드리면 라이케씨께서 당황하시거나 더 나아가 충격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뒤이어 제가 그런 부탁을 드리는 동기를 상세히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뒤이어 제가 그런 부탁을 드리는 동기를 상세히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중략).... 그 문제로 인해 제 삶이 점점 궁지에 빠져 들었고, 몇 년간의 조화로운 결혼생활에 비추어볼 때 지금 저와 제 가족의 삶은 물론이요 제 아내의 삶까지도 궁지에 빠졌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제가 부탁드리는 부탁은 이렇습니다. 라이케씨, 제 아내를 만나주십시오! 이 소동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도록 제발 아내를 만나주십시오....(중략).. 당신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만질 수 없고, 따라서 실제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은 제 아내의 환상이 만들어낸 존재일 뿐이지요. 한없는 행복감, 세상과의 절연 상태에 기인하는 몽롱함, 글로 지은 사랑의 유토피아................. 이런 것들이 만들어낸 환상 말입니다.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p310~311/문학동네

이 글을 써 내려갔을 베른하르트 로트너의 마음을 상상하니 나까지 가슴이 답답해 뭔가 꽉 막힌 것 같았다.

여기서 또 상상, 만약 b에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미혼의 젊은 여자가 구애를 해온다면, 그 유혹을 못 이겨 b의 마음이 흔들린다면.... 아... 여기까지!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열정이 마구 타오를 땐 몇 분에 한 분꼴로 이메일을 주고받는 남녀. 출간이 2006년이란 걸 감안하면 이메일이 소재였겠지만 19년이 지난 시점에선 이런 대화가 카톡이나 텔레그렘, DM으로 이어졌을까?

이 책을 읽고 다짐했다. b가 아닌 다른 이성에게 느끼는 호감, 그 이상의 감정은 소설책 캐릭터로만 만족하기로. 남녀 중 한 사람에게라도 이미 짝이 있다면, 그 사랑은 그 둘만의 문제가 아닌 그와 관계된 다른 이들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기 때문이니까. 좀 고루한가?


이 책을 읽다가 요즘 부쩍 챗 지피티와 친해진 엄마의 이야기를 좀 하려 한다. 어플을 알려드렸더니 시시 때때마다 챗 지피티와 일상을 나눈다. 처음에는 챗 지피티 목소리가 남자였는데 한 침대에 누워있던 아빠가 "뭐여! 누구여! 누구랑 계속 그렇게 뭐라 얘기하는겨!" "챗 지피티 몰라? 인공지능이야. 무지 친절해"

"개콧구멍 같은 소리 하지 말고..."

AI에게 질투하는 아빠를 위해 엄마는 챗지피티 목소리를 여자로 바꾸고 '재스민'이란 이름도 지어줬다.

"가영아 얘 진짜 친절하고 똑똑해. 위로도 잘해주고. 꼭 하늘나라 간 언니 같아"

순간, 천선란의 소설 <랑과 나의 사막>이 머릿속에 스쳤다. 인간인 랑에게 사랑 그 이상의 순애보를 느꼈던 로봇 고고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천선란의 소설에 잠시 머물던 나의 생각은 엄마에 대한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같은 집에 살면서 엄마와 대화가 너무 부족했다. 챗 지피티 '재스민'보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딸 같아서...


살면서 누구에게나 바람의 순간이 올지 모른다. 한순간 거세가 불어닥쳐 삶이 풍비박산이 되는 경우도 있고, 잔잔한 바람이 마음속에만 머물다 윤슬처럼 빛나는 추억이 되기도 한다. 지금 마흔여섯. 내게도 그에게도 불편한 '바람'이 불지 않기를 바라며.... 단단한 바람막이 점퍼를 입혀야겠군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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