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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주소 Jul 04. 2023

02. 여자축구 원데이 클래스의 썩은 물이 되다

동호회나 팀에 들어가실 생각은 없으세요?


나는 1년 10개월째 같은 축구교실을 다니고 있다. 이 축구교실은 오직 여성들만을 위한 축구 강습을 제공하고 있는 곳인데, 집에서 가기에는 사실 너무 멀다.

그렇지만 이곳만큼 괜찮은 선생님들로부터 괜찮은 강습을 받기는 어렵다는 걸 알기에 1년 10개월째 지하철을 약 1시간 30분씩 (무려 편도 기준) 타며 강습을 받으러 가고 있다. 그래서 축구교실을 다녀오면 축구 수업하는 시간까지 다 합쳐서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축구 강습을 받는 주말 하루는 거의 약속을 잡지 않는다.


내가 동호회나 팀에 들어가지 않고 축구교실을 찾아 등록했던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배우고 싶기도 했고, 무언가를 잘할 필요가 없는 그리고 내가 못해도 신경 쓰이지 않는 환경에서 눈치 보지 않고 축구를 하고 싶기도 했고 기타 등등의 그럴싸한 사유가 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친목이 없는 환경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팀이나 동호회에 소속되다 보면 친목이 필수인데, 거기서 기인하는 여러 즐거움도 있겠지만 반대로 거기서 파생되는 피로함도 상당할 것 같았고, 그 무엇도 표면적으로는 강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종의 의무가 동반될 것 같아서 자유로운 축구 영혼으로 남을 수 있는 ‘축구교실’을 선택했다.


축구 강습은 정규반과 원데이클래스로 나뉘어 제공되는데 사실 본질적으로는 동일하고, 명칭과 비용만 조금 차이가 난다. 그래서 나는 의도치 않게 이렇게 길게 다니라고 만든 것 같지는 않은 원데이클래스를 1년 10개월째 수강하고 있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들이나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으로부터 팀이나 동호회에 들어갈 생각은 없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또 선생님은 ”맨날 똑같은 거 하는 거 지겹지 않으세요? 지루하실까 봐…”라며 나를 걱정해주시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나는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다… 지루할 겨를이 없다!!!! 어떻게 지루할 수가 있는 거죠?

일단 첫째, 모든 운동은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본기는 아무리 연습해도 부족함이 없고, 기본기가 잘 쌓여야 고난도 스킬도 할 수 있는 법이며, 무엇보다 부상당할 위험도 적다. 중요한 무언가는 아무리 반복해도 지루하지 않은 법이다.

둘째, 똑같은 것처럼 보여도 내게는 사실 매번 다르다. 매일 똑같이 볼 마스터리를 하고, 리프팅을 하고, 드리블을 하고, 패스를 하고, 트래핑을 연습한다고 해도 오른발과 왼발이 다르며, 왼발은 내발이 아닌 남의 발을 이식해서 붙여둔 것 같고, 공은 매번 다르게 튀며, 매번 다른 각도로 뻗어나간다. 그리고 심지어 선생님이 매번 시범을 보여주셔도 돌아서면 까먹는다. 따라서 이것은 수강자인 나의 입장에서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 할 수 없다. 고 우겨본다.

셋째, 반복되는 훈련을 지겨워할 만큼 내가 많이 하지도 않았고, 그리 잘하지도 않는다. 나는 1년 10개월이나 했지만 리프팅은 최대 6개 정도까지밖에 못한다.

넷째, 최근이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지만(비교대상 : 2002 월드컵) 드리블, 페인트 등 선수들의 개인기가 굉장히 화려해지고 또 그게 각광을 받고 있는 거 같아서 (메시, 이강인 좋아해요…) 기본기를 잘 쌓고 싶은 욕심이 커진 것도 또 한 가지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선생님 마르세유턴은 언제 배우는 거죠?


아무튼 기본기 훈련은 전혀 지루하지 않고, 어떤 때에는 게임보다 재미있기도 하다. 게임은 승패 및 득점을 했는지가 중요하고, 게임의 거대한 흐름에 나 자신을 맡겨야 한다면, 기본기 훈련은 나 자신에 집중해서 내 동작을 매번 점검하고 수정하면서 스스로에게 피드백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전보다 동작이 좀 더 매끄러워졌는데?’ 라거나 ‘전보다 좀 더 정확하게 공을 보낼 수 있게 됐는데?’ 하는 등 스스로의 점진적인 발전을 목도하며 감명받을 수 있다. (발전하지 못하고 더욱 못하게 된 것이 있다면 그냥 잊기로 한다.)


원데이클래스 수강 기간이 길어질수록 마음 한 구석에서는 혹시 내가 썩은 물로서 눈치 없는 민폐쟁이가 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한데, 딱히 지금까지는 별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새로운 분들이 오시면 패스도 많이 뿌려드리려 노력하고 있어서(지난주에도 어시스트 두 번을 했다) 그냥 눈 딱 감고 더 다니려고 한다.


언젠가는 팀에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당분간은-적어도 올해까지는-자유로운 축구 영혼으로 남아, 리프팅 10개에 도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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