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키트 in 신촌 : 과거
‘당신의 최애 장소는 어디인가요?’ 필자가 학교 신입생 인사 글을 적을 때 기억에 남았던 질문이다. 생각해보면, 어떤 추억을 회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어디서’이다.
장소가 있어야만 본인이 실제함을 알 수 있고, 세상을 알 수 있었다.
이렇듯, 장소는 존재를 인식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로서 한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이 담길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촌은 제 삶에 이정표를 제시해 준 곳이죠.’ 연세대학교 93학번 졸업생이 한 인터뷰에서 신촌이라는 장소에 붙인 수식어다.
그만큼 80, 90년대 청년들은 신촌에서 배웠고, 표현했고,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청년들은 신촌에서 멀어졌고
그러다 신촌은 색깔 없는 거리가 되었다.
학생의, 학생에 의한, 학생을 위한 장소인 신촌.
이번 ‘로컬키트 신촌’을 통해 필자는 과거 신촌이라는 장소가 지녔던 색을 발견하고자 했다.
지금의 홍대는 과거 신촌의 역할을 하고있다고 볼 수 있다.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촌거리의 쇠퇴는 홍대거리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촌의 청년 문화를 이끈 이색적인 소규모 가게들은 높아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주변 지역인 홍대로 자리를 옮겼고, 그에 따라 홍대가 신촌의 청년들을 흡수했다.
홍대는 신촌의 문화를 계승한 곳 답게 골목을 중심으로 다양한 가게들이 들어선 공간들을 형성했다
이후 홍대는 지속적으로 젊은 문화를 선도하며 사람들을 더욱 끌어모았고, 걷고 싶은 거리나 경의선 숲길 같은 공간이 조성됐다.
때문에, 필자는 과거의 신촌과 현재의 홍대를 공간적인 관점에서 비교한다면 신촌의 그 색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답사를 통해 다녀온 홍대거리는 오히려 현재의 신촌거리와 많은 부분이 유사했다.
버스킹 공연으로 유명한 홍대의 레드 로드는 신촌의 스타 광장과 닮아 있었고, 거리를 채운 여러 가게는 걷는 거리인 신촌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홍대 또한 임대료 상승 등으로 연남동 등 새로운 장소에 의해 입지를 잃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대거리는 여전히 북적거려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촌거리는 여전히 한산해 보인다.
왜 과거 신촌의 모습이 없는 홍대거리에는 사람들이 모일까?
신촌의 과거는 지역 고유의 가치가 아닌 하나의 유행이었던 것일까?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필자는 홍대거리와 과거의 신촌거리를 비교하는 데 공간적 요소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머무름’이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을 이뤄내 인터넷의 정보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수도권 밀집화가 가속화되었다.
특히 대중교통이 확대되면서 다양한 장소를 방문할 기회가 많아졌고, 집에서의 통학이 자유로워졌다. 유동 인구가 늘어났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변화는 홍대거리가 신촌처럼 소규모 상점의 이탈로 독창성이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북적거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공항철도, 경의중앙선, 2호선이 지나 서울 지하철역 중 세 번째로 많은 이용객을 거느린 홍대입구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프랜차이즈 매장과 팝업스토어가 위치해 있다. 그 주변으로는 상점, 식당 등이 자리한 번화한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작은 상점, 미술학원, 공연장이 떠나간 빈 건물들이 들어선 거리가 나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홍대거리는 ‘머무름‘이 아닌 ’지나감’에 맞춰진 거리가 돼 있었다.
하지만, 신촌이 많은 사람들을 품었던 90년대에는 상황이 반대였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서로의 위치를 알기 힘들었기 때문에, 만남의 광장이라 불리던 가게들이 있었고, 많은 시간을 동아리 부원, 동기들과 보냈다. 또한 다양한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신촌에서 하숙, 자취 생활을 했다.
종이 지도뿐이던 시절 청년들은 멀리 가기도 번거로울 정도로 교통 여건이 좋지않고, 정보를 얻기도 어려워, 학교 앞 신촌 로터리에서 만나 하루 종일 신촌에서 웃고 떠들며 토론하고 즐겼을 것이다.
그렇게 머무르며 형성된 공동체들은 사회를 움직였을 뿐만 아니라, 신촌이라는 지역도 움직였다.
그들의 취향에 맞는 문화가 발전했고, 신촌에는 그런 문화를 즐길 장소가 많아졌다.
책방에서 글을 공유하고, 락 카페에서 음악을 즐겼다.
그렇게 과거의 신촌이 만들어졌다.
여기서 필자는 신촌이라는 장소에도 가치를 부여해 보았다.
과거의 신촌은 ‘머무름’이 있었기에 존재했다. 신촌의 색은 머무름의 아름다움이다.
‘여행의 기술’에서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여행에서 돌아온 날, 자비에르 드 마스테르의 ’내 방 여행하기’ 책을 추천하면서까지 방문하는 장소보다 방문자의 그 장소에 대한 태도를 강조한다.
필자가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게된 이유 또한 이 태도에서부터였다.
기술의 발달로 무엇이든 선택지가 많아진 시대에 사는 필자에게 없는 타지에 대한 애착이 과거 신촌을 경험했던 분들에게는 보였었다. 필자는 장소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대체 무엇으로부터 왔을까 고민했다.
물론 바쁜 현대사회에서 ‘지나감’ 또한 필연적이지만, ‘머무름’만이 같은 장소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머무른 장소는 누구에게는 청춘이 된, 누구에게는 이정표가 된, 누구에게는 서운한 곳이 됐다.
머무름으로 형성된 장소와의 관계는 지역을 바꿀 정도로 강력했고,
머무름은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이 장소에 담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신촌에 다시 머무름을 일으키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를 따라 ‘머무름’을 거부한다면, 신촌은 과거의 신촌이 되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는 학생들의 머무름이 신촌을 만들었다면, 지금은 신촌이 학생들의 머무름을 만들 차례이다.
글: <local.kit in 신촌> 과거팀 조정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