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의 이야기들
#첫 번째 글
골목 어귀에 볕 들어온다. 담벼락 물들이던 따뜻한 기운이 어느새 발뒤꿈치를 적신다. 잔바람 따라 허연 꽃가루가 풀풀 날리는 것이 꼭 아지랑이 같다. 반대편에서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웅웅거려도 그리 싫지는 않다. 평소 같았다면 진작 고개를 돌렸을 텐데. 누가 그러더라, 바뀌는 계절은 비스듬한 마음을 한 꺼풀 벗겨내 누그러뜨린다고.
…
기억 속 혜화는 부산스러운 장소였다. 젊음이 들끓는다는 표현이 퍽 잘 어울리는, 나는 물이고 거리 위 그대들은 기름 같았던. 그래서인지 듬뿍 정을 주진 못했다. 네온사인과 떠들썩한 밤 풍경에 섞이는 취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돌아설 즈음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여느 청춘처럼 이 도시에서 빛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해묵은 걱정은 본체만체 늘상 반짝이던 그대들이 조금은 미웠다.
세월이 흐른 어느 봄, 다시 걸어 보자며 선 이곳은 대학로 한복판. 한때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기로 했다. 세공된 젊음으로 도배된 혜화에서 빈틈을 찾고 싶었다. 무섭도록 찬란한 이곳일지라도, 가벼이 한숨 내쉴 틈 하나쯤은 있으리란 생각으로.
날씨 덕을 좀 봤다. 길 위에 포개진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나른한 봄기운이 밀려오니 거리에 남은 옛 기억은 가물가물해졌다. 앞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바람결에 이끌려 홀린 듯 샛길로 들어섰다. 구석구석 숨은 책방들이 마음에 들어 주변을 기웃거렸다. 시간도 많으니 양껏 시집이나 읽기로 했다. 왼쪽으로 정렬된 문장 사이에서 이따금 튀어나오는 낯선 단어들을 꼭꼭 씹으니 달큰한 맛이 났다. 뱃속에 든 활자들은 무엇이든 상상해도 좋다며 쿡쿡 찔러댔다. 제법 성가셨다. 그래, 내가 졌어. 이런 날도 있어야지.
성화에 못 이겨 볕이 잘 드는 카페를 찾았다. 편하게 앉아 잡생각을 늘어놓기로 했다. 만지작거리던 휴지 끄트머리는 금세 축축해졌고 미끈거리는 판나코타는 아까 들춰본 시집만큼 달았다. 여유로운 한낮을 기념하려 몇 장 남은 필름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와 오래된 다방을 찾아가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피어오르는 상념들은 그대로 흘러가도록 두었더니 바깥이 어두워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거리 한복판 소란스러운 말소리는 어느새 듣기 좋은 음률이 됐다. 어려 보이는 학생들이 많았다. 아아, 한창이네. 멀리서 반짝이는 이들이 웃으면 나도 덩달아 웃었다. 뒤에서는 웬 실성한 사람이냐며 수군댔을 거다. 그래도 웃음이 나는 걸 어쩌랴. 나는 이런 빈틈 사이에서 즐거워하는 것도 꽤 좋아한다.
돌이켜 보니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눈이 부셔 금방 지쳐버릴지도 모른다. 때때로 빛나고 싶은 순간에는 극장을 떠올리기로 했다. 간혹 무대가 아닌 객석 쪽으로도 조명을 드리울 때가 있다. 그러면 어둠에 묻혀 있던 어렴풋한 미소나 눈물지은 얼굴들이 언뜻 비친다. 무르익은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찰나의 주인공으로 남는 것도 나름대로 멋지지 않은가.
마침 흐릿한 가로등 아래 서 있는 이와 마주쳤다. 앳된 얼굴에 소탈한 차림을 한 그는 듣는 사람도 몇 없는 조용한 공원에서 꼭 그게 제 삶의 마지막 무대인 양 노래하고 있었다. 아니, 어떤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무언가를 태워내고 있었다는 문장이 더 어울리겠다. 그의 턱끝에 땀방울이 맺히고 툭 떨어지기를 반복했는데 그 속에는 환희의 눈물이 섞여 있는 듯했다. 여태 본 어느 이보다도 밝게 빛나던 그의 공명에 압도돼 한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수수하지만 아름다운 청춘이 고요한 이곳에 꽃을 피웠다. 이 봄밤에 그는 내게 어떤 빈틈이었고, 나 또한 그에게 그런 존재였을 테다. 메워지지 않은 빈틈들은 서로에 기대어 한숨 뒷면의 희망을 나눴으리라.
구태여 벌어진 틈을 채우려 들지는 않으련다. 애석하게도,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비워 둔 채로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
글: <local.kit> 김서정 에디터
#두 번쨰 글
월 평균 유동인구 55,549명
가게들로 가득한 낮은 건물들, 거리에 풍기는 분주하지만 여유로운 사람 향기.
혜화는 비록 거주인구가 1만6148명으로 종로구에서 2번째로 많지만,
행정동 기준 월 생활이동인구는 2백만명에 육박한다. 더 많은 거주인구를 가진 노원역도 2백만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혜화역은 방문자들의 향기가 더 진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혜화역.
대학로로 유명한 지역이다. 역명을 대학로로 바꿔야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또한 이곳은 대학 문화예술의 중심지이다. 서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방송통신대학교가 주변에 위치해 수많은 학생들이 연극무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혜화역하면 대학로, 대학로하면 연극.
얼핏보면 다들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이곳을 방문한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진 않다.
120개가 넘는 카페와 책방은 가게마다 가지각색의 배경에서 여유를 만끽할 수 있고
서너곳의 공원에서는 휴식과 사색을 통해 각자의 경험을, 버스킹 공연을 보며 공통된 경험을 만들 수 있다.
또한 대학로로 이어지는 1,2,4번 출구 대신 3번 출구로 나오게 되면 서울대학교 병원과 창경궁이 내려다 보고 있다.
혜화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목적과 경험을 품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진짜 색깔은 이곳을 방문하여 각자의 목적을 즐기는 사람들이 만든다.
혜화역은 해가 지지 않는, 동상이몽과 이상이몽으로 가득한 문화예술의 산실이다.
-
글, 사진: <local.kit> 조정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