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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un 13. 2023

나는 기억 한다. “내가 첫사랑을 했다는 것을”

- 학창 시절의 교회 후배 민경이와 이루지 못한 첫사랑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동급동반(同級同班) 여자 부반장 민후는 잠실의 한 교회를 다녔다. 나는 민후를 짝사랑한 나머지 수소문 끝에 그가 다니는 교회를 찾아 등록했다. 말조차 건네지 못하면서 주일만 되면 민후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교회를 빠지지 않고 다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교회에서 민후가 눈에 띄지 않았다. 학교 친구 동석이는 졸업 전에 민후에게 “고백하라”고 넌지시 던졌다. 그렇지만 쑥스럽고 떨려서 도저히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왠지, 민후 앞에 서면 작아지고 몸이 굳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좋아한다는 감정 표현도 못 한 채 졸업을 맞이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내 기억 속의 민후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중학교를 입학하고 교회의 중고등부 구성원이 되었다. 중고등부 모임은 매주 토요일 오후 7시에 예배드린다. 통기타 치며 율동하고 찬양하는 그 시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흘러갔다. 여름이나 겨울방학 수련회도 빠지지 않고 동참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된 그해 성탄절, 새벽 송을 돌고 교회에서 따듯한 난로로 몸을 녹이고 있었다. 옆에는 1년 교회 후배 민경이와 이런저런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밤을 지새웠다. 


내가 사는 아파트 인근에는 둑(둑방)이 있어 산책하러 자주 갔다. 그런데 민경이를 우연히 둑길에서 만났다. 다음날도, 다 다음날도…….그러다 보니 민경이를 만날 수 있다는 목적이 생겨 둑길을 더욱 찾게 됐다. 그 당시는 핸드폰은커녕 삐삐도 출시되지 않았는데, 시간 때를 잘 맞춘 것처럼 둑에 가면 민경이가 나를 기다리며 반기듯 했다. 어느 날, 대화 중에 민경이 친오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듣고 보니 한때 가방 들기를 해줬던 전학 간 친구였다. 그 친구는 작은 키에 코도 들창코인데 민경이와 상상할 수 없이 대조적이다. 사실 지금 생각해도 두 남매의 얼굴 구조는 조합이 되지 않는다. 그런 민경이는 잠실에 소재한 아파트에 살다가 가족들이 ‘청주’로 이사한 뒤, 방학이 되어 친척 집에 잠시, 머물러 온 것이다. 


방학이 끝난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민경이랑 떨어지면서 펜팔을 주고받았다. 민경이를 만나기 위해 다가올 여름방학을 고대하면서 편지가 오가는 나날로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느지막이 한 통의 편지를 전달받았다. 그런데 편지 봉투는 누가 열어보고 다시 붙인 것 같았다. 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꺼내 읽었다. 연필로 쓴 장문에 한 줄의 취소 선을 볼펜으로 쭈욱 그어 “오빠 공부 좀 열심히 하세요”라는 아이러니한 문구가 적혀있다. 아무리 봐도 엄마 글씨체 같기도 하고, 누나 글씨체 같기도 했다. 나는 누나를 향해 “혹시, 누가 편지 읽었어?”라고 묻자, 누나는 “누가 네 편지를 읽으니?”라며 시치미를 떼지 만 물증 또한 없었다. 


드디어 고대하고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돌아왔다. 그런데 아버지의 일방적인 강요에 가족들은 방학 동안 강화도에 있는 직장 관사에서 지내자고 언급하셨다. 엄하신 아버지의 주장에 반기를 들 수 없어 귀양살이 끌려가듯 무거운 발걸음을 걸었다. 강화도에서 누나의 실토로 밝혀진 사실은 지난 편지의 내용 중 “교실 칠판에 오빠 얼굴만 생각나요”란 문구가 “오빠 공부 좀 열심히 하세요”라고 위조된 엄마와 누나의 공동 행위로 자백받았다.


그렇게 강화도에서 지내면서 민경이와 연락이 두절되었고 그 후로 만날 수 없었다. 연락은 두절됐지만 고속버스를 타고 먼저 충남 조치원으로 향했다. 조치원은 외할머니와 이모가 거주하는 외갓집이다. 조치원에서 청주까지는 불과 4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민경이를 만날 수 있다는 꿈을 꾸며 편지 봉투의 주소 ‘충북 청주시 우암동 ㅇㅇ 아파트’ 앞까지 찾아갔다. 용기가 없는 나는 아파트 주변만 빙빙 겉돌면서 인근 공원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맑고 드높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앉았던 공원 벤치는 수십 년 동안 기억에 남게 해 주는 첫사랑을 연출해 주는 의자였다고……. 민경이를 만일 만났다면 첫사랑이 이루어졌을까?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이렇게 저술하는 것이 아니던가, 어느덧 눈가에는 주름이 그려져 있지만, 지나간 추억을 되새기며 지금도 잊히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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