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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진 이성숙 Jun 08. 2024

안아드릴게요, 오슈비엥침

월간쿨투라 5월호


오슈비엥침은 아우슈비츠의 폴란드식 발음이다. 기차 매표소 유리창에 대고 ‘아우슈비츠!’라고 하면 유리막 너머 직원이 오슈비엥침? 이라며 억양을 높인 후 표를 건네준다. 인간이 저지른 악몽의 현장, 그곳에 가기

위해 크라쿠프에 숙소를 잡았다. 오슈비엥침은 크라쿠프에서 기차로 약 2시간 거리다.


오슈비엥침과 비르케나우 유대인 학살 현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리암 존 니슨이 주연을 맡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나치 학살 시기 수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구한 독일인 사업가 쉰들러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 배경이 크라쿠프다.

어제 체코 프라하에서 7시간 반 만에 크라쿠프 도착,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서 크라쿠프 중앙역으로 나선다. 오슈비엥침에 가기 위해서다. 폴란드 여행은 폴란드가 아니라 오슈비엥침 여행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오직 그곳을 보러 왔으니까. 오슈비엥침은 오전 10시 이전엔 무료입장이라기에 새벽부터 서둘렀다. 그러나 무료 티켓은 이미 매진, 영어 가이드 동행 투어 티켓을 산다. 결과적으론 혼자 여행한 것보다 잘한 일이었다.


혼자 다녔다면 건물 한 동 한 동의 쓰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광대한 오슈비엥침을 다 돌아보기도 어려웠을 듯하다. 가이드 덕분에 오슈비엥침을 학습한 후 버스를 이용해 비르케나우까지 안내받는다.


오슈비엥침 유대인 수용소에는 당시의 건물과 가스실, 주인 잃은 유품들이 처참하게도 생생히 전시되어 있다. 죽은 사람들의 안경 무덤, 신발들, 어린아이들의 신과 옷, 여행 가방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가스실에서 사망한 여자들 머리카락을 모아서 짠 카펫은 분노를 넘어 슬프기만 하다. 실내 공기는 관리가 잘 되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불쾌한 냄새가 두통을 일으킨다. 순전히 기분이라고 느끼는데 옆에서 관람객 한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입을 막는다. 그이는 감정선까지 북받친 모양이다....


오슈비엥침-비르케나우 수용소는 나치가 저지른 대량 학살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약 110만 명이 생명을 잃었으며, 그중 대다수는 유대인이었다. 오늘날 이곳은 세계 최대 홀로코스트 기념관으로 방문객들에게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한 지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한 사람의 광기가 만들어 낸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다.


왜 하필 오슈비엥침이었을까


왜 하필 오슈비엥침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슈비엥침은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 근처에 위치해 지도상 유럽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지리적 이점 때문에 나치는 각 나라에서 유대인을 운송하기 용이한 중심지로 이곳을 선택했다. 물류 중심이 될 뻔한 도시 오슈비엥침이 같은 이유로 학살의 현장이 되었다니, 이 소름 끼치는 선택 앞에서 나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가스실에 들어온 사람은 유대인만은 아니었다. 슬라브 민족, 집시 민족, 그 외 나치에 반대한 정치범들과 원치 않는 요소로 분류된 평범한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그중 유대인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유대인 중에서도 헝가리 유대인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폴란드어로 오슈비엥침이라고 불리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는 나치 치하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학살 현장 중 하나였다. 철조망이 둘려진 수용소 시설은 나치 정예 친위 대원 SS 병력이 감시했다. SS 대원은 수용소 통제와 감시탑 경계, 수감자 학살까지 담당했다. 수용소 내부는 사진과 함께 설명하는 게 낫겠다. 죽은 이들의 유품을 모아 놓은 사진은 고민 끝에 이곳에 남기지 않기로 한다. 고인을 대하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직접 가서 볼 수 있기 바라는 마음이다.


카지미에슈 유대지구


오스카 쉰들러 공장. 크라쿠프 중앙역에 내리자마자 가방을 기차역 보관함에 두고 오스카 쉰들러 공장으로 향한다. 공장까지는 전차로 15분 거리. 공장은 유대인 지구 카지미에슈에 있다. 쉰들러 공장을 견학하기 위한 줄이 저녁 해가 담을 넘은 시각까지도 줄지 않고 있다. 벽에는 당시에 살아남은 사람들 사진이 흑백으로 붙어 있다. 이곳은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쉰들러 공장을 나와서 카지미에슈 유대지구(크라쿠프 중심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위치)로 향한다. 카지미에슈 유대지구는 한때 번영했던 유대 커뮤니티의 중심지였다. 나치 점령 기간 동안 많은 유대인이 이곳으로부터 격리되고 추방당했다.


검게 그을린 건물들, 총 자국 선명한 건물들이 거리에 우정 방치되어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주인이 누군지도 모른 채 역사를 짊어지고 서 있는 건물들이다. 한두 채가 아니다. 처절한 절규가 낙서되어 있는 건물들

이 발길을 무겁게 한다. 집주인 이름인 듯 선명한 낙서, 살던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그림을 입고 있는 벽돌 건물, 이런 건물들로 마을은 침통하고 침체된 듯 보이나 다시 눈을 뜨면 카지미에슈는 살아 있다. 다만 마을

전체가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그 흔적을 지우지 않고 있을 뿐이다. 참담했던 그 시간을 말로써는 다 설명할 수 없겠기에 말이다. 그러고 보면, 상처는 애써 지우는 게 아닌가 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살아서 전하는 말이 있으니.


상처 입은 골목을 천천히 걸어 돈 후 나는 카지미에슈, 그 거리에서 점심을 먹고 예쁜 카페에서 차도 마신다. 나의 수집 품목 1위인 ‘행운의 개구리’도 5개나 산다. 오던 길을 되짚어 걸으니 또다시 비스와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벨 성(Wawel Castle)


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는 바벨 성이 늠름하다. 바벨 성 지하 동굴에는 소녀를 잡아먹는 용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국 사람에게 용은 상서로움의 상징인데, 폴란드에서는 무서운 괴물이었던가 보다. 왕은 용을 잡는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선포했고, 구두 수선공 그라쿠스는 유황으로 속을 채운 양을 이용해 용을 유인하여 죽였다. 그 후 그라쿠스는 공주와 결혼하였으며, 크라쿠프라는 도시 이름은 이 인물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진다. 바벨 성 담 아래에는 청동 조각의 용이 있으며, 이 용은 15분 간격으로 입에서 불을 뿜는다.


폴란드에 다시 올 때는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을 방문하고 바르샤바로 향할 생각이다. 마리 퀴리의 유산을 탐방하고, 무엇보다도 우울하지 않은 폴란드를 기록하고 싶어서다.


크라쿠프 영웅광장


크라쿠프 영웅광장은 의자 조각이 있는 광장으로,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이 마지막으로 기차를 기다렸던 곳이다. '영웅광장'이라는 이름은 게토에서의 저항과 생존 투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삼엄하게 놓인

청동 의자들은 무서운 외로움의 파편인 게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홀로코스트로 떠나고, 버려진 의자만이 남았다. 의자 옆에 꽃을 두고 가는 이들도 있다. 날은 하필 비가 내려, 의자 위로 앵혈 같은 빗물

이 후드득 흘러내린다.


광장 모퉁이에 위치한 독수리 약국은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을 도운 폴란드 약사 타데우스 판키에비츠가 운영했던 곳이다. 이 약국은 유대인에게 음식과 약을 조달하고 은신처를 제공했다. 오스카 쉰들러와 마찬가지로 판키에비츠는 폴란드에서 추앙받고 존경받는 인물이다.


홀로코스트를 외부에 처음 알린 얀 카르스키와 유대인 묘지 지구


얀 카르스키, 유대인 묘지 지구 옆에 그의 동상이 있다. 얀 카르스키(1914-2000)는 폴란드 외교관이자 저항운동가로 2차 대전 중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서방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인물이다. 본명은 얀 로만 코지 엘로프스키이며 카르스키는 전쟁 중 사용한 별명이다. 1939년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폴란드 군대 장교였다. 


독일군에 체포되었다 탈출한 그는 폴란드 지하 저항 운동인 홈 아미(Home Army)에 합류하여 폴란드 내부 상황을 서방에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카르스키의 보고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초기 증언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그는 이를 기반으로 ⸀비밀국가⸥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게토 벽(사진 6)의 담장 머리가 둥근 것은 죽임 당한 유대인을 추모하는 의미라고 한다. 나치 정부는 유대인을 게토 지역에 모아 두고 이렇게 두꺼운 벽을 쌓았다.


오던 길을 되짚어 걸어 호텔 앞까지 왔다. 호텔 앞으로는 비스와강이 흐른다. 상처 위로 흐르는 강물이다. 젊은 엄마가 강가에서 노니는 백조에게 먹이를 던져가며 아기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에서 태권도를 배웠다는 그녀가 뜻밖에도 한국말로 내게 말을 건다. 크라쿠프에서 태권도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반가워서 우울한 상념에서 깨어난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고 아기와 사진까지 찍은 후 아쉽게 헤어졌다. 올가라는 이름의 태권도 선생님!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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