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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누 Nov 16. 2023

7. 해안의 이야기

몽글몽글 카페 사람들


 모처럼 기분이 좋은 날이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아이에게는 다가가지 않았다. 원래의 나라면 그녀가 식사준비를 하는 동안 그녀의 귀여운 아들과 놀아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식사준비를 돕지도 않았다. 원래의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귀여운 꼬마아이를 보면 사죽을 못쓰니까. 게다가 누군가가 일을 하고 있으면 곁에 가서 한마디라도 거들어야 직성이 풀리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더 이상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서 사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해안이 거문마을에 온건 우연이었다. 실은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두었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표였다. 는 항상 파리에 가고 싶었다. 방학 때 해외로 여행을 가지 않은 것은 한 번쯤 제대로 외국으로 가고 싶은 꿈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정된 일정이 다가오자 마음이 바뀌었다. 그녀는 비행기 표를 모두 환불해 버렸다. 도대체 그 기분으로 가방을 싸서 어디를 갈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걱정했다. 지운이는 그녀에게 매일 전화를 걸어주었다. 엄마는 그녀의 방에 오래도록 앉아 있다가 가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녀가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병원에 갔다. 병원에 앉아 있으니 고요하니 좋았다. 그녀는 병원에 앉아 대기하는 시간이 좋았다. 이 시간 동안 그녀는 그 무엇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기다리면 되었다. 그녀의 눈앞에 놓인 책장에 있는 바라만 봐도 심신이 편해지는 제목의 책들과 책장 옆에 놓인 방울 모양의 초록 잎이 달린 유칼립투스를 바라보았다. 박해안 씨라는 이름이 불리면 일어서서 의사의 방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그녀는 집에서조차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런데 병원에 앉아 있는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한 공간과 사실이 그녀를 벌써부터 편하게 했다. 병원의사는 이 동네에서 꽤나 유명한 여자 의사였다. 투명한 안경을 쓴 의사는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한 시간 가량이나 들어주면서 펜으로 열심히 받아 적었다. 그리고 그녀가 병원에 올 때마다 그 종이를 다시금 뚫어지게 보며 그녀의 이야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그녀는 그 진료차트를 보면서 늘 그렇게 물었다. 

 "학교생활은 어때요?" 

 하지만 해안은 학교이야기만 나오면 불편해졌다. 그녀의 표정이 그녀가 편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니까 의사는 그냥 이야기를 돌리곤 했다. 학교이야기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학생 이야기였다. 그녀는 그 학생 이야기만 나오면 몸이 굳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의사는 피하지 않았다. 아주 조금씩 그 학생들 이야기의 분량이 늘어갔다. 확실히 이 의사는 유능했다. 밖에서 기다리는 대기환자도 많았다. 

'내 이야기처럼 지루한 이 이야기가 왜 이토록 중요할까.'

 문득 해안은 밖에서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도 나 같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속이 불편해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하셔도 돼요. 약만 받아가셔도 돼요. 그렇게 하고 싶으세요? 해안 씨?"

 의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해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구역질이 나서 입을 틀어막으며 아래위로 고개를 흔들며 인사를 꾸벅하고는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는 통에 대기 중이던 환자들이 일제히 해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구토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울어버렸다. 


 그 사건 이후로 그녀는 한 달을 집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것도 없어 보였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걱정이 되었지만 워낙 완강하게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통에 더 이상 권유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과 학교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어느 날 해안은 부모님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계속 이렇게 두면 안된다는 말고, 그럼 싫은 애를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다. 아빠는 결국 엄마에게 당신이 이렇게 아이를 온실 속에 화초처럼 자라게 했다는 말을 했다.


 "그래? 그게 내 탓이네요.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수 있었는데요?"

 아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럼 당신이 해보세요. 내가 잘 못 한 거니까, 나한테 맡기지만 말고 말이에요."

 "그래. 좋아. 내가 어떻게든 해안이... 다시 학교 가게 만들 거야."

 "뭐라고요? 학교요?"

 "해안이가 학교에서 어떤 수모를 당했는데. 왜 다시 가야 해요? 해안이가 그 험한 꼴을 당하고..."

 "학교가 아니더라도 사회에서 그런 일들이 있어." 

 "아니에요. 당신은 몰라요. 해안이가 뭐가 힘든지." 

 "여하튼 해안이의 꿈이었잖아. 학교가. 오직 선생님이 되겠다고 달려온 아이인데 그깟 일 때문에 그런 꿈을 접으면 해안이는 지는 거야."

 "이기고 지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 말을 하니까 해안이가 하기 싫어도 다닌 거 아니에요."

 "그만해." 

 "그래요. 그만해요."


 철커덩. 아빠는 집을 나갔다. 해안은 엄마가 조용히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다. 창문에 커튼을 걷으니 아빠는 집 앞 가로등 밑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끊었다고 한 건 다 거짓말이었다. 

 '어디에 있었던 건지 몰라도 담배와 라이터가 늘 있었던 거잖아.'

 '거짓말쟁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해안은 다음 날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불과 2주 후였다. 처음에 엄마와 아빠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해안은 그럭저럭 괜찮은 척 연기를 하면서 그들을 속이기로 했다. 밥도 잘 먹고 가끔 산책도 했다. 여행에 대한 기대를 곧잘 이야기하기도 했다. 아빠와 엄마는 내심 안도하는 것 같아 보였다. 해안과 엄마는 같이 근처 백화점으로 가서 쇼핑을 가기도 했다. 아무 일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실 그곳에서조차 해안은 학생을 만날까 봐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해안의 불안한 얼굴을 살피던 엄마가 말했다.

 "해안아. 여행 꼭 가야겠니?"

 "왜 엄마?"

 "나는 네가 집에서 더 안정이 되면 갔으면 좋겠어."

 "엄마,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어."

 조용한 카페 안, 식어가는 커피잔을 앞에 두고 엄마는 연신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해안은 파리로 가는 표를 취소했다. 그것도 비밀리에. 그리고 그녀는 파리로 가려고 챙겨둔 큰 트렁크 하나와 백팩을 들고 이곳 거문마을의 거문게스트하우스로 왔다. 

 여기서 조금만 지내다가 정말로 파리로 갈 예정이었다. 거문마을은 꽤 마음에 드는데 게스트 하우스가 마땅치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한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바다가 보이는 정원에 삼층짜리 건물, 그리고 정원에서 손님인지 모를 한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사진 아래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카페 하나 없는, 아무도 없는, 정말 조용한 게스트하우스.


 '이곳이야.' 

 그녀는 다른 생각할 것 없이 이곳으로 왔다. 그렇게 사진 속에서 보았던 그 게스트하우스에 자신이 와 있었다.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이른 아침 일어나 게스트하우스 주변을 산책했다. 그리고 비가 그친 뒤 햇살을 받아 싱싱한 풀잎들이 무성한 정원에 놓인 탁자와 의자를 발견하고는 걸터앉았다. 

 '바로 이곳이야. 그 사진.'

 자신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 

 "여기 멋지죠? 비가 그치니까요."

 "그러네요."

 게스트하우스의 젊은 여자 주인이 대문을 열고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재이라고 불리는 귀여운 남자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여주인이 아침부터 재이를 학교에 태워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주인의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위로 불그스름한 아침 햇살이 강렬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햇살 틈으로 서 있는 그 주인여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커피 마시러 갈 거예요. 갈래요?"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모처럼 그녀의 입맛을 다시게 되는 제안이었다. 

 "아니에요. 전 혼자..."

 "안돼요. 너무 혼자 있으면. 그리고 거문마을을 알아야 여행을 다니죠. 제가 대충 설명해 줄게요. 자 이거 타요."

 그녀는 곧장 게스트하우스 건물 뒤로 들어가 삐익 삐익 소리가 나는 자전거 한 대를 끌고 왔다. 딱 봐도 오래되고 낡아 보였다. 내가 그 자전거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얼른 고물 자전거의 안장에 올라탔다. 

 "으쌰. 손님은 저기 타요. 내 친구 안장이 있지만 뭐 방해가 되지 않을 거예요. " 

 '친구? 그 꼬마아이를 말하는 건가?'

 신박한 표현이다. 


 여하튼 예전의 나라면, 이대로 탔을 리가 없다. 고물 자전거에 올라타는 주인에게 내려오라고, 내가 그 자전거를 타겠다고 말이라도 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맙다고 연신 말을 덧 붙였을 것이다. 이제는 아니다. 감정이 사라진 건지 말이 나오는 목구멍에 문제가 생긴 건지 모르겠다. 다만 나의 뇌가 뭔가 달라진 건 확실했다. 뇌에서 그러니까 명령을 내리던 방식이 바뀌었다. 자극이 오고 반응이 나타나야 하는데 자극이 와도 반응하려는 의지가 거의 사라졌다고나 할까. 그래. 내 안의 나를 지탱해 오던 의지라는 것이 다 타 없어져 버렸다. 


 해안은 말없이 주인이 타라는 데로 꼬마를 위한 안장이 달린 고물자전거보다는 연식이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새로울 것도 없는 흔한 자전거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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