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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누 Jun 18. 2024

ep17. 라스트 카니발

이현과 수호

 해안과 이현은 그렇게 아침이면 카페를 찾았다. 네 명은 종종 오전에 커피를 마셨고 가끔은 한주도 끼어서 레모네이드를 홀짝홀짝 마셨다. 한주는 SNS에 능해서 한주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한주는 빵 만드는 일에 정성을 쏟아부었고 종종 엄마의 전화를 받고 빵을 만들다 말고는 집으로 가는 날도 있었다. 이현의 게스트 하우스에도 손님들이 늘었다. 거문바다는 인기 있는 휴양지는 아니었지만 근처 바다들이 점점 모래사장이 유실되는 바람에 한적한 거문바다를 찾는 관광객도 종종 있었다. 점점 이현은 카페를 찾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이현이 카페에서 하던 소소한 일거리들을 이제는 해안이 도맡아 하게 되었다. 




 "재이 엄마 많이 바쁜가 봐."


 거문바다의 양 끝쪽에 살고 있는 유일한 아이들, 라니와 재이는 주말이면 한 번씩 만나는 친구였다. 라니 엄마는 오랜만에 재이 엄마를 만났다. 


"언니가 바쁘죠. 무슨."

"그건 그렇지. 나는 커피 마시러 올 시간이 안 나네... 이게 얼마만이야."

"재이엄마는 계속 요즘 카페에서 일한다고들 하던데?"

"커피 얻어마시러 와요."

"아니, 여기 사장님들이 이렇게 멋진데 안 오고 싶나."

"뭐, 그것도 그렇죠."


굳이 변명할 이유도 없는 듯 이현이 말했다. 


"나도 라니 아빠만 없어도... 여기 옆집으로 이사 왔을 텐데..."

라니 엄마가 카페 옆 철이네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철이네 집은 작년에 집을 팔려고 내놓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 

"아니, 이 참에 재이네가 여기로 오면 되겠어."

라니 엄마는 얼음이 섞인 카페 라테를 단숨에 들이키며 말을 이어갔다.

"그럴까 봐요."

이현은 체념한 듯 답했다. 


"얼마나 힘들었어?"

"네?"


"아니, 처음에 왔을 때 말이지."


라니 엄마가 거문바다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데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숙소에 손님이 왔나 봐요. 나 가야 될 거 같아요. 재이 좀 부탁해요, 언니."


이현은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고 바쁜 듯 카페를 나섰다. 

"어, 그래 그래. 내가 이따..."



이현은카페 문을 닫고 뛰기 시작했다. 오늘은 날이 흐렸다. 하늘이 흐리면 바다도 대체로 흐렸다. 흐린 바다에 파도가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하얀 물보라가 이리로 흩날리고 있었다. 잊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흐린 바다 앞에 앉아서 하얗게 이는 물보라가 자신을 덮치기를 바랐던 그날, 거문 바다 앞에서 결심했다. 


 죽지 않으리라고.


어린 재이를 두 팔에 앉고, 아이 옷가지만 몇 개 챙긴 가방을 끌면서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죽지 않을 거야.


 "그럼 그렇게 죽지 않지."

작은 꽃집 할머니가 말하곤 했다. 

 

"죽으려면 바닷가에 들어가야 죽지. 물이 덮치기만 기다려서 죽나."


"아니, 할머니 내가 죽기를 바라요?"


"죽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니까."


"내가 용기가 없다는 말이죠?"


"사는 건 더 용기가 필요하지."


"그럼 내가 용기가 있다는 말인 거예요?"


볼 멘 소리로 이현이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뽀송뽀송하게 마른 재이의 내복을 소리 없이 개키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고개를 들어 바다 쪽을 바라봤다. 오늘 바다는 더없이 잔잔했다. 


"죽이든 살리든 어떻게 좀 결판을 내기를 바랐어요."








 S사 사내 홍보팀 정이현, 그녀의 명함에 새겨진 글자들이었다.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팀으로 발령이 나자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운명은 내 편이라니까."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바라던 대로 인생이 펼쳐졌다. 그토록 원하던 대학에 원하던 과에 들어갔고, 과외를 하면서 돈을 벌어서 배낭여행도 꽤 다녔다. 이렇게 쭉 살 수 있는 인생을 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사내 홍보팀에 들어가고 싶었다. 전투적으로 일할 필요도 없고 잘릴 일은 더더욱 없다. 너무 많은 능력을 보여줄 필요도 없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녀는 심장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탈 때까지도 가슴이 미친 듯 쿵쾅거렸다. 수많은 인파들이 모인 지하철을 타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구간에 다다를 때쯤에 그녀는 오늘을 받아들였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사는 중이야."


어느 날, 지하철을 타려고 내려가는데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그 바이올린 소리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슬픈 듯, 비장한 듯, 하지만 경쾌한 리듬을 놓치지 않는 이상한 곡이었다. 그 음악 소리가 나는 곳은 지하철 안에 있는 레코드 가게였다. 그녀는 가게에 들어가서 차마 그 곡 제목을 묻지 못했다. 레코드 가게에 들어간 건 겨울과 봄이 지난여름이었다. 하얀색 바탕에 하늘색 체크무늬가 새겨진 블라우스에 남색의 정장 바지 아래는 또각 거리는 구두를 신은 이현이 발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늘 5분 정도 서성이던 레코드 가게에 들어가서 그녀는 매일 나오는 그 곡의 이름을 물었다. 


 "라스트 카니발"


그녀가 제목을 소리 내어 외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렸다. 


"대리님,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미리 써둔 사표를 회사 다이어리에 잘 꽂아 두었다. 다이어리를 가슴팍에 묻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찰나, 송대리가 이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도 할 말이 있어! 이현 씨"


"네? 어떤..."


"우리 남동생 만나볼래요? 이현 씨랑 왠지 잘 어울릴 거 같아서."


그때 사표를 냈더라면 어땠을까? 송대리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사표를 내고 라스트 카니발을 들으며 계획했던 여행을 떠났으면 어땠을까?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또 작은 마을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태어나 처음 보는 수도원을 향해 떠났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쯤 다른 세상에서 조금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렇다면 재이는? 




"할머니, 할머니 인생은 용기 있었어요?"


얇은 거즈 천의 재이 수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작은 꽃집 할머니는 널브러진 수건을 펼쳐서 '탁, 탁, 탁' 힘껏 공중을 향해 털어내고 반을 접고 또 반을 접으며 말했다.


"아니..."


이현이 할머니 옆에서 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두요. 나는 선택할 용기가 없었어요. 인생이 나를 선택하기를 기다렸는지 모르겠어요. 죽을 때조차..."


"재이를 선택했잖아. 나도 수호를 선택했으니까, 우리는 용기 있는 여자들이지."


"엄마잖아요."


"엄마라고 다 용기 있는 건 아니야."



마지막 빨래는 재이의 양말이었다. 할머니는 양말 다섯 켤래를 접어서 갈색 바구니 안에 넣어서 이현에게 건네며 말했다. 


"우리는 아이와 남기로 선택한 거야. 남는 것도 용기야."




이현은 하얀 물보라를 보며 자신의 게스트 하우스를 향해 뛰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라니 엄마의 한마디에서 시작된 할머니와의 이야기를 떠올리던 중이었다,


"아! 이름, 생각났다!!!"


"정수호!"


"맞아. 정 수 호야. 할머니 집 아들."


그 아들이 돌아왔다. 할머니 집으로. 그녀의 아들이 바로 카페 사장 정수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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