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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누 Oct 12. 2024

오후의 산책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어요. 그냥 떠나고 싶은 날.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나에게는 그런 곳이 프랑스였어요. 참 웃기죠. 고등학교 때 나는 집이 싫으면 도서관으로 떠났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도서관 커피가 너무 맛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경주를 떠올렸거든요. 그때 읽고 있던 책의 주인공이 경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때문인지... 그날부터 경주에 너무 가고 싶었어요. 혼자서 떠나는 꿈을 꿨었죠. 그런데 결국 못 갔어요. 웃기죠. 경주도 혼자 못 간 내가, 다른 나라에 가서 살 생각을 했다니. 여행을 떠나는 건 돌아오기 위해서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어딜 가든 상관없겠죠. 장소는 말이에요.


나는 경주도 갔고, 파리도 갔어요. 그런데 돌아오긴 했네요. 그러고 보니. 그렇게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도서관은 안 갔는데요? 난 책 읽으면 두드러기가 나요. 실은 책을 좋아는 하지만 읽지는 않아요. 뭐 그것도 여행 같은 건가. 어차피 다 읽으면 책과는 다른 현실 세상을 살아야 하는 몸뚱이잖아요. 난. 그럼 뭐 하러 읽나. 그래서 기분 좋아지는 만화를 읽어요. 가끔 해안 씨가 두꺼운 책을 들고 와서 읽는 걸 봤는데, 나는 그런 책은 들기도 싫던데... 


아무도 없는 카페 안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한 적막을 견디기 힘들어서 둘은 각자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해안은 목소리가 커졌고 기훈은 평소보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산책 갈래요? 


좋아요. 손님이 오면 어쩌죠? 


팻말을 이렇게 돌려놓으면 되죠. 이게 자영업자들에게만 허락된 특권 아니겠어요.


기훈이 open을 closed로 돌려놓고 포스트잇에 글을 써서 카페 문 앞에 붙였다. 


오늘은 개인사정으로 쉽니다.

미안해요.



죄송합니다가 낫지 않아요? 미안해요는 조금은...

뭐 어때요. 미안해요가 더 친근하잖아요. 여기까지 카페를 오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보다는 더 여유로운 법이거든요. 


둘은 햇살이 내리쬐는 바다를 걸었다. 파란 바다 옆 검은색 돌이 이어진 길들이 조화로워 보였다. 바다 옆에는 모래사장이 있잖아요. 그런데 바다 옆에 검은색 돌이 있으니까 멋진 거 같아요. 사진을 봤거든요. 여기 오기 전에. 게스트하우스 블로그를 쳤는데 게스트 하우스 소개는 세줄이 있었어요. 이름, 전화번호, 운영시간 그리고 이 해변의 사진이 몇 장 있었어요. 멋졌어요. 


그래서 파리로 안 가고 여기로 온 거구나. 


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저씨는 왜 여기로 왔을까? 자유로운 차림새에 말투, 커피를 내릴 때 보면 손이 의외로 여자 손같이 고왔다. 파리에서 결혼했고, 아이가 있었고, 그리고 느닷없이 왜 여기일까.


문득 궁금해진 해안은 기훈에게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여행은 꼭 돌아가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여행은 내일 떠나도 될 이곳에서 용기를 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해줄게요. 아까 하려다 만 이야기. 나는 해안 씨처럼 떠났어요. 구체적인 목표도 없이, 파리로. 당시에 나는 떠나고만 싶었어요. 다시는 돌아올 거라고 생각 안 했죠. 여기는 나의 고향이니까. 공부도 흥미가 없었고... 가족도... 뭐... 서로 보기만 하면 할퀴었던 거 같아요. 그때는. 떠나고 보니 고맙더라고요. 그것도 나중에 느낀 거지만. 파리는 나에게 잘 맞았어요. 다행히. 뭐, 고생도 많이 했지만. 재미도 있었죠. 


센 강이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진짜 거지 같은, 거지였나? 그런 남자와 멀쩡해 보이는 여자가 나왔는데. 그런 영화에서 파리에 대한 환상이 깨졌거든요.


맞아요. 정확히. 나는 환상이 없었거든요. 파리에 대한. 그래서 괜찮았어요. 그런데 환상 같은 일이 벌어졌죠. 그런 거지 같은 남자가 멀쩡한 여자를 만나서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은 공주 있죠? 그런 그런 아이도 낳았거든요. 비현실적이었어요. 집에서 돌아오면 아이가 있었어요. 그것도 나보다 불어를 더 잘하는 그런 아이가. 


아마도 이 남자는 마음이 깨진 거구나. 그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그 환상을 못 견뎌서 나온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걸 안다. 우리 아빠도 그랬다. 공장에서 나가면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남들은 크리스마스에는 나가서 외식을 하고 여름에는 바다로 여행을 간다는 것을 자신의 현실에는 없는 비현실로 받아들였으므로. 그런 남자들이 의외로 환상의 일이 자신의 세계에 일어날 까봐 두려움에 떤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기훈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이 남자는 마음이 깨진 거구나. 어쩌면 더 아프게, 아, 사랑이 깨졌거나. 


신발을 벗고 모래 위를 걸어요. 모래 위는  뜨거우니까 바닷물로 들어가서. 이렇게요.


해안이 먼저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고 양말을 벗어 맨발로 바다에 들어갔다. 신발을 가져갈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기훈도 곧 그렇게 했다. 


파도가 들이치면 기분이 좋잖아요. 숨 쉬는 것 같잖아요. 바다가. 우리가 숨 쉬는 걸 한 번씩 까먹으니까,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친다고 생각했어요. 하늘이 숨을 쉬고, 바다가 숨을 쉴 때 내는 숨이 바람이고 파도라고 생각하면 왠지 편안해져요. 


기훈은 웃었다. 그의 평소 웃음 답지 않은 잔잔하고 점잖은 미소만이 가득한 웃음. 

웃음을 짓고서 기훈은 맨발로 바닷가를 걸었다. 해안은 기훈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현은 긴 청바지의 끝을 걷어 올렸다. 


문득 그래요. 나는 숨 쉴 때마다 내 딸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기훈은 해안을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걸었다. 가끔은 바다를 쳐다본다는 것을 알았다. 해안은 숨을 들이쉬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하얀 거품이 비누처럼 자신의 발을 씻겼다. 선선한 바람이 불 때는 고개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기도 했다. 햇살이 너무 눈이 부셨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도 끝이 나고 긴 침묵도 끝이 났다. 


이제 밥 먹어요. 배가 고파요.


해안이 먼저 말을 했고 기훈은 다시 웃어 보였다. 어떤 그리움은 씻어내려고 해도 씻어지지 않는다. 어떤 아픔은 벗겨내려고 해도 벗겨지지 않는 것처럼. 그럴 때는 평소 때보다 조금 더 걷고, 여느 날보다 조금 더 웃고, 매일 살던 곳을 조금은 떠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기훈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처럼, 해안이 파리를 꿈꿨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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