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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승영 Sep 11. 2024

불행에 MSG를 쳐볼까

<우리 인턴은 무얼 하나> 사회생활 편

두 달 전에 입사한 우리 부서 막내는 해산물을 먹지 않고 오리고기를 싫어한다. 


막내의 제1의무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내색하지 않고 먹는 것. 그러나 이미 토마토와 수박을 안 먹는다고 선언한 우리의 막내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옆 팀 대리님께서는 입사 기념으로 맛있는 걸 사주시겠다며 스시집을 예약하시고, 백숙과 삼겹살을 저울질하던 부장님은 하필이면 오리를 택하신다. 입사 2주차의 막내 인턴은 사회적 체면을 위해 스시집에 가고 능이오리백숙과 홍어전과 동태탕을 먹는 어른이 되었다. 


스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메뉴 결정권을 손에 쥔 대리님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연어가 듬뿍 들어간 후토마끼와 이름모를 생선이 종류별로 올라간 초밥을 주문하셨다. "이 동네에서는 여기가 그나마 젤 나아요. 몇 안 되는 맛집이니까 많이 먹어두고. 어차피 멀어서 자주 나오지도 못해." 막내는, 해산물은 비리다는 편견을 가득 안고, 어른 행세를 하며 초밥을 입안 가득 욱여넣었다. 


엥, 와사비에 깔린 연어는 그닥 안 비리네? 짭조름한 간장에 잔뜩 버무려진 이름모를 바다고기는 부드러웠다. 혹시 모를 비린내를 뿌리뽑기 위해 각종 소스를 총동원한다. 해산물에다가 소스를 더하니 비린 맛이 사라지는 스시집의 공식! 에피파니의 순간이 이런 것이던가, 불행에 MSG를 잔뜩 친다면 행복의 맛을 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콩비린내조차 힘들어하는 막내가 해산물을 먹지 않는 것은 어쩌면 본능적인 일이다. 그런데 소와 돼지와 닭을 먹는 육식 인간이 그다지 비리지도 않은 오리를 먹지 않는다? 지대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막내는 학창시절 급식 메뉴에 자주 등장하던 훈제오리에 묘하게 거부감이 들어서 오리와 담을 쌓고 살았다고 고백한다. 고등학생 땐 몇몇 '오리 싫어'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었단다. 오리가 나오는 날마다 편의점에서 외식을 하며 우정을 다진 탓에, 회식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오리백숙의 존재를 깨달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니까, 백숙은 당연히 닭을 삶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삼계탕은 많이 먹었어요.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백숙의 사전적 정의를 검색해봤는데, 글쎄 '고기나 생선 따위를 양념을 하지 않고 맹물에 푹 삶아 익힌 음식'이라잖아요. 에휴, 나 참." 


어쨌건 오리는 주어졌고, 막내는 이것을 섭취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 가련한 주인공 역을 맡게 됐다. 우리의 불쌍한 주인공은 스시집의 교훈을 곧바로 적용해본다. 불행을 상징하는 오리 다리에 후추와 소금 같은 MSG를 듬뿍 치곤 아주 조금 베어물었다. 후추맛 닭고기 같았다. 이건 오리가 아니라 닭이다, 주문을 되뇌며, 그는 목전에 펼쳐진 만찬을 조금씩 해치웠다. '푹 삶은 오리는 푹 삶은 닭이다!' 해산물에 이어 오리까지 정복했다는 나름의 기쁨에 취하려던 찰나, 식당 사장님께서 서비스로 홍어전을 내어오셨다. 


홍어전 한 조각이 그에게 배당된다. 분위기를 깰 수는 없으니 냄새를 참고 먹어야만 한다. 세네 번정도 씹으니 향이 코를 찌른다. 암모니아를 한껏 내뱉는다. 대체 누가 이런 고기를 처음으로 먹을 생각을 했나 몰라, 틀림없이 굶어 죽기 직전의 사람이었을 게다. 부장님께서는 홍어전의 맛에 흡족하셨는지 사장님께 한 판만 더 주시면 안되냐고 여쭤보신다. 아.. 부장님.. 막내는 힘없이 속으로만 탄식한다. 인심 좋은 사장님 덕에 두 번째 배당을 받는다. 이게 음식이 아니라 주식이면 얼마나 좋을까. 입안에 은은히 퍼지는 암모니아를 조용히 공중으로 흩날린다. 


마침내 그는 깨닫는다. 아무리 MSG를 쳐도 행복에 다가갈 수 없는 불행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의 Z세대 막내는 단전에서 올라오는 구역을 참기 위해 소맥을 들이킨다. 가보자고. '그래도 해야지 어떡해'라는 믿음만이 그를 움직일 것이니라.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지난 주에는 점심 회식을 했다. 이달 말부터 이래저래 바빠질 테니 미리 밥이나 먹어두자는 부장님의 제안에, 대리님이 고심 끝에 선택한 곳은 다름아닌 동태탕 집. 막내는 한탄한다. 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동태탕도 먹어요?" 라는 과장님의 물음에 탄식을 숨기며 긍정을 표한다. 이야, 진짜 안 가리네, 칭찬을 들으니 쥐구멍에 숨고 싶다. 막내는 차오르는 불안에 MSG를 치며 과장님의 차로 향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 진짜? 지나가나? 언제? 퇴사하면? 퇴직하면? 으아악! 


동태탕을 마주보고 앉는다. 소금도 후추도 없이 오직 동태만이 눈앞에 존재한다. 대리님이 국자를 들었다. 점심 배당이 시작된다. 부장님께 한 국자, 과장님께 한 국자, 자기 접시에 한 국자, 그리고 인턴에게 한 국자. 생선은 싫어하지만 생선을 끓인 물은 잘 먹는 괴상한 식성의 막내는 숟가락을 먼저 잡는다. 매콤짭짤한 국물로 MSG를 치자, 속을 다져놓으면 동태를 씹어도 비린 맛이라고는 느껴지지도 않을 테다. 국물을 연달아 다섯 번을 마시곤 젓가락을 들어 동태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어라, 동태는 생각보다 맛있다. 씹을 수록 고소함이 입안에 퍼진다. 연어 후토마끼와 스시를 떠올린다. 이 집 동태 좀 치네. 조기어강 대구목의 동태는 연골어강 홍어목의 홍어보다 조기어강 연어목의 연어에 가깝다. 


모두가 동태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밑반찬 계란찜이 이십여분째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얀 자기그릇에 푸딩 같이 담긴 계란찜이 놓인 자리는 하필이면 부장님 앞. 부장님은 왜 이건 아무도 안 먹느냐며 직급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던지신다. "이거 먹을 사람?" 막내가 황급히 숟가락을 들어 의사 표현을 한다. 제가 먹겠습니다, 부장님. 계란찜을 입에 넣는다. 엇, 이게 아닌데. 비릿한 향이 코를 찌른다. 헛구역질을 겨우 삼킨다. 홍어를 참았는데 계란에 무너질쏘냐. 동태탕집은 어째 계란찜도 비리다. 동태를 한 점 더 먹는다. 믿었던 계란찜은 막내를 배신했지만 입에도 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동태가 그를 살렸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십여 년을 산 막내에게 세상은 여전히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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