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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 Jul 17. 2023

장마철의 측우기

소용량 측우기의 용량초과 적응과정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고 그마저도 굵고 거세 하얗게 눈앞을 비안개로 채워갔다. 물에 젖는 건 딱 질색이지만 집에서 하루를 보내버리기엔 너무나도 무색한 하루가 될 것 같아 우산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저 멀리 먹구름 사이에 간신히 엿보이는 햇빛에 비친 밝은 구름을 찾곤 했다.


눅눅해진 날씨 덕분에 몸까지 축 쳐져 결국 쪼그려 앉게 되었고,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만든 도넛모양 점묘화 비슷한 걸 보고 있자니 도넛을 그리던 도화지였던 웅덩이는 점점 커져만 갔고 배수관은 방치된 화초의 푸석한 흙더미에 막혀 역류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울컥이고있었다.


따로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저 방관하다 집으로 돌아가 다시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았고 습관처럼 틀어놓은 TV에는 이곳저곳이 퍼부어 내리는 비에 차오르는 수위를 견디지 못하고 넘쳐버린 댐들과 강 또는 호수들이 삶의 터전을 망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또다시 방관하곤 소파에 기대어 가만히 빗소리에 잠겼다.


이 시기에는 항상 내렸고 차올랐다. 내리고 차오른 게 어떤 순서인지 그리고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다.




무슨 생각의 변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장마철은 내리는 비보다는 차오르는 어떠한 것들이 많아 곤욕을 치르고 있다.


차오르는 것은 어떠한 것에 담겨있고 무한하지 않은 나는 넘쳐흘러 주체하지 못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득 차 보였다. 그릇은 불투명하였고 담아둔다는 말뿐이었지 사실은 숨겨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보호색을 띤 색이었다.


그릇의 적정 수위를 유지하면서 어딘가에 몰래 투기하듯 버린 그릇 안의 내용물들은 폭우처럼 무례하게 내리는 것들에 의해 오도 가도 못해 넘쳤고 어쩔 수 없이 나는 눈에 보이는 상황과 날씨를 탓하려 장맛비를 싫어하게 되었다.


내리는 비에 감정을 담아 미안하지만 나중엔 고마울지도 모르겠다. 이미 이리저리 흘러넘친 터라 정신이 없어 일단은 내리는 시기니까라고 생각하려 한다.


어딘가로 떠나는 것을 계획하는 이나 장화가 마침 해져 구멍이 뚫린 누군가는 비가 내리는 걸 걱정하지만 호수를 지키는 관리인이나 텃밭주인은 물이 차오르는 걸 걱정하기 마련이다.


아마 나는 소용량 측우기와 비슷한 메커니즘의 감정주머니를 가지고 있는데 과하지 않은 정도의 어떠한 것들이 내리면 그것을 분석하고 데이터로 쌓을 수 있지만 이러한 장마철만 되면 이미 넘쳐흘러 폭포아래의 실험용 비커가 되곤 한다.


그래서 많이 내리는 시기만 되면 자연스럽게 잠겨있곤 한다. 잠깐의 숨 막힘이겠지만 그 안에서 자유로워진다면 그 장마는 나에게 경험이 되어 다음의 장마철에는 지금의 잠겨지는 나의 수위까지는 버틸 수 있는 무던함을 주기 때문이다.


사건의 연속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이번 장마철도 꽤나 많은 것들이 무작위로 내리다 보니 과부하가 온 상태라 어떤 것부터 대처를 해야 할지 정리는 어디서부터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그냥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있는 아주 편안한 모습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비유하자면 뭍에 꺼내져 눈만 끔뻑이는 날치 혹은 과체중의 게으른 방관자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 창문에 커튼을 치고 이어폰을 꺼내 음악이라도 들으며 기분이라도 내려고 한다. 잠시동안은 막이 내린 무대 천장에 뚫린 작은 구멍들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닦아내는 시간이 있어야겠지만 일단은 비가 그치기 전까지는 방치해두려 한다. 무대는 안타깝게도 나무바닥이라 오래 방치하진 않고 나무가 썩어 불룩하게 울기전에는 치울 예정이다.


내리는 장마가 끝나고 나면, 정확히는 차오르는 것이 멈추고 나면 또는 잠기는 것이 익숙해질 때 즈음 평소처럼 듣고 보고 말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리며 일단은 잠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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