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언어 번역기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현실이라는 과자틀에 단단하게 굳어버린 건조한 반죽 같은 나를 욱여넣어 맞추곤 다른 과자들과 동일한 공산품이 되었다.
현실은 아마 급여 따위나 돈으로 치부될 것이지만 사실은 그게 전부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전부를 돈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나는 틀에 삐져나온 머핀처럼 높디높은 과자틀을 딛고 머리만 빼꼼 내밀어 꿈을 기웃기웃 엿보고 있었다.
그리운 시절을 말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코흘리개 어릴 적이다. 이유는 간단하게 대상을 그대로 바라볼 줄 알았던 또는 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그때의 내가 더욱 빛나고 아름답기에 그렇다.
아름답게 둥글어진 돌멩이를 호주머니에 간직하고 내 키보다 크고 굵은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것에 흐뭇해하며 그림을 보면 잘 모르겠고 음악을 들으면 졸리거나 신났던 그때가 훨씬 지적이고 도도하다.
언제부턴가 나는 나만의 언어를 창조해 내었고 그에 맞는 번역기를 가지고 모든 걸 해석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본질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나뭇가지를 보면 어떤 나무인지 알고 있는 것이 힘이었고 그림을 보면 누가 어떤 의도로 그린건지 파악하는 것이 지능이 되어버린 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면 남들의 의식이나 시선 속에서 사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 시선이 나에게 지배적이진 않기에 나 또한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의식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를 보는 시선의 찰나가 다신 오지 않는다면 그 찰나가 나의 영원이 될 수 있기에 행동하는 것에 있어 또는 행하는 것에 있어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어떠한 예술 앞에 '현대'가 붙어있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서사와 의미부여를 잔뜩 해놓고는 말도 안 되는 행위나 결과물을 보여줘도 어느 정도 인정이 되는 것에 약간의 희열감도 느끼기도 한다. 다만 왜 현대인은 그 말도 안 되는 것을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또는 말이 되는 걸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의문점이 많지만 아직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현대예술이 있나 싶다.
한없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고성능 번역기가 되어 모든 언어에 내 가치관을 넣어 해석하고 나의 컬러렌즈가 되어 모든 걸 짙은 갈색으로 물들여 버리게 되어버린 것이 아쉬울 뿐이다.
여전히 돌멩이는 바닥에 널려있고 나뭇가지는 굵지만 그걸 주워서 간직할 수 없게 된 것이 아쉽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순수한 사람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완결무결의 깨끗이 빛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거니와 있다 하여도 가까이 지낼 생각은 없다. 완전한 빛이 아닌 이상 그림자는 더욱 선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초봄 뙤약볕의 그늘진 버드나무를 좋아한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빛이 쬐이면 가느다란 이파리사이로 백건 흑건의 피아노를 바닥에 수놓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
들려오는 커다란 노랫소리를 바람에 사락거리는 잎사귀에 묻혀 잘게 나누어주고 누군가가 망치듯 흩트려놓은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리해 주기보다는 나도 흐드러지게 나뭇가지를 흩트려 멋쩍지 않게 해주려 한다.
아마도 번역기로서의 삶을 부정하지는 않을 듯싶다. 이미 적응해 버린 어른이 되어버린 터라 이 사고회로를 지우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에는 어렵겠다.
다만 나를 거쳐 무언가가 지나간다면 가지런히 모여 밝게 빛나는 성냥 끝자락보다는 자욱하게 핀 안갯속 무지개처럼 희미하지만 보고 싶은 것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