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부조화로 인한 작동중지
계절에 대한 인지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가로등이 번질 정도로 습도를 유지하는 도로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신호등이 분주하게 점멸하였고 현실과 타협, 비현실이라는 세 방향이 표기된 이정표에 따라 분주하게 사람들은 삼거리에서 이곳저곳으로 움직였다.
차차 켜져 가는 불빛 중 노란불빛이 빛을 발할 때에는 모두가 멈춰있었고 그들의 표정은 찰나의 정적이 주는 안도감 또는 앞으로 어떠한 불빛이 켜질지 예상하지 못하는 상태의 뒤통수에서 울린 경적 같은 두려움이었다.
이 전 신호등의 색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고 나는 그저 빨간색이던지 초록색이던지 간에 당장은 짙게 물들어버린 덜 익은 단호박색의 불빛을 바라보며 그대로 있기를 원했다.
그렇게 가을을 예상하고 있었다.
나 또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때로는 어릴 적 하늘로 쏘아 올린 놀이공원의 헬륨풍선 곁으로 무분별하게 움직였고, 종착점 없이 가로등 불빛에 취한 불이 꺼진 반딧불이 또는 손잡이가 없는 투명한 찻잔 안에 깃든 뜨거운 난류였으며 다만 분명한 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진정 내가 도착해야 하는 곳을 바라보며 정처 없이 걸어가는 사막의 지평선 그 너머인지인지 혹은 사막 끄트머리에 자리한 오아시스를 바라보며 걷는 수평선너머에 엮인 무지개인지는 모르겠다.
수많은 차선들은 결국 하나의 차선으로 합쳐져 좁아터진 골목이 되었고 어느샌가 옆에는 그렇듯이 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비좁은 골목을 지나가기에는 숨이 막혀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나는 넓고 자유로운 곳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밀려 급류가 되었다.
방향을 안다는 것은 꽤 중요하다. 물론 기호로서의 방향의 표기는 가능하지만 이제와서는 내비게이션이나 핸드폰의 애플리케이션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이정표가 필요 없게 되었다.
가끔은 나의 위치가 궁금하여 길가의 이정표를 보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외딴곳에 떨어져 어디론가로 가고 있었으며 내가 원하는 위치가 아님을 깨닫고는 또다시 점멸하는 신호등의 불빛에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이곤 했다.
아마 내가 저 불빛을 꺼버리고 싶은 이유는 조타수의 수군거림에 등 떠밀려 흐르지 않고 나의 의지로 가고 싶음에 그럴 것이다.
나는 늘 그렇다는 듯이 당연하게도 파도를 높낮이와 상관없이 잘게 나누어 거품 내었고 편도로서 출발한 콜럼버스의 배처럼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시작과 끝을 이어 왕복하지도, 이겨 부순 파도거품을 보며 만족할 수도 없었다.
조타수들의 부추김에 급류가 되었을 때에는 초조함에 나 또한 직접 선원들의 소금기 먹어 축축해진 등을 보며 일제히 노를 젓기도 했다.
속도가 빨라지자 하늘을 담았던 바다라는 오목거울은 희여 멀건 거품으로 가득해져 더 이상 비출수도 담을 수도 없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 나의 배는 차가운 양 떼들에게 둘러싸여 양치기의 바람대로 자유롭게 흐르지 않고 인위적으로 옮겨지곤 했다.
이제는 양 떼 같은 거품이 가라앉을 때까지 노를 잡지도 어떠한 신호등의 불빛도 담지 않으려 한다.
비좁은 골목을 택하더라도 양 떼들의 털이 깎여 나에게 얽매이지 않을 때를 기다리려고 한다.
작은 꿈이 있다면 분주한 삼거리에 걸린 신호등의 채색된 불빛을 끄고 길 한가운데 거주하며 이정표에 적을 내용을 사유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와 같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