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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 Oct 02. 2023

바다에 몰래 버린 소금

얕은 배덕감이 주는 위안



신호등이 꺼진 새벽에 밟아보는 중앙선, 철저한 나날 중에 급작스레 떠나 만나게 된 낯선 것들, 어린 마음에 꺾어 불어버린 민들레꽃, 버리지 않고 어딘가에 남아있을 누군가의 편지들.


어긋나 버렸다기보다는 어슷하게 걸쳐있는 감정들은 균형감 없이 나의 무게중심을 뒤흔들기에 적절했고 그럼에도 겹쳐진 두 개의 막대기는 자석처럼 붙어 떨어지거나 훼손되지 않았다.


감정은 그저 시소라는 물체를 연상케 하듯 하나의 막대가 상승하지도 하강하지도 않고 갸웃거리는 모습이었다.


주춧돌을 박아두기에 막대기는 털을 바짝 깎은 강아지풀정도의 모습이었기에 부드러운 솜털을 뭉쳐 어느 정도 단단하게 만든 구체로 주춧돌을 대신했다.


두 개의 막대기는 가볍고 부드러워 원하는 색으로 언제든지 탈바꿈하거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막대기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밝을 수 없었고 하나의 막대기는 먹물로 만든 얼음처럼 녹아 없어져도 검댕이로 남아야만 했다.


눈을 감지는 않았지만 막대기를 비튼 건 나였다.






체스판 위에 신이 있다면 그것이 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체적으로 관대한 나는 한정된 타일 위에서만은 빈번히 흑과 백에 집착하여 큰소리 내어 분노하기보다는 조용히 다음 말을 옮겼고, 즐긴다기보다는 방관하여 반대편의 색(혹은 밝기)이 지배당하는 것을 감내하였다.


하지만 지금 나의 용맹한 말들은 장대비에 내다 놓은 폐지더미처럼 산산이 무너져 내렸고 검고 희던 단단한 바닥은 축축한 습기에 젖어 부드럽게 무뎌져 곧 회색으로 중화되어 이도저도 아닌 색으로 얼룩져 구획이 없어졌다. 나는 말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모래시계는 야속하게도 청력이 꽤나 좋지 않은 편이다. 떨어지는 중력에 비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나의 얕은 목소리는 비좁은 유리 깔때기에 모래알이 부딪히는 마찰음 보다 연약하여 허탈한 애원을 듣지 못하고 시계로서의 하던 일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마찰음이 잦아들 때 즈음 급박함에 손에 잡히는 대로 혼잡스러운 회색바닥 위의 확실한 명도를 가진 둔탁하고 길쭉한 것을 서둘러 움직였다.


기물의 상단부를 만져 어느 정도 유추를 한 후 대각선으로 몇 칸 옮기곤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안개 같은 습기가 걷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을 때는 그것이 직진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직한 나의 체스판에는 비뚤어진 수가 놓였고, 하필 그 기물은 가장 가치 있는 굳센 망루였으며 또한 지켜야만 하는 가치였다.


사실은 누군가가 목격하지도 않았으며 체스판은 곧 나이기에 그 가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 늦게나마 망루의 머리를 날붙이로 단정히 가다듬어 대각선으로 움직이는 말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불온한 달콤함과 어긋난 음계의 마찰음에 잉태된 불협화음은 배덕감이라 칭하기에 충분했다.


규칙은 손가락 두 마디의 움직임에 무너져 내렸고 그럼에도 안개는 늘 걷히지 않았기에 묵과하였다.


내 무릎 앞, 체스판건너편에는 언제나처럼 울컥이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대는 공업단지의 굴뚝 혹은 겨울철 내리는 눈같이 풍성한 마음으로 버스 창문에 도화지를 불어 만드는 어린아이의 잔뜩 부푼 입김이 자리했다.


체스경기의 양상은 늘 동일했다. 나의 체스는 항상 무승부로 끝나야만 했고 규칙적이고 엄격해야 하며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기에 지금 느끼는 감정은 나의 규칙에 대한 또는 내가 창조한 체스판에 대한 배덕감이겠다.


어긋나 버렸다는 것에 감정은 고조되어 분노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끔은 눈을 감고 말을 움직이는 것도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가 나에겐 일탈이며 배덕이었고, 이젠 그리울 정도로 필요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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