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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광용 Jan 14. 2024

아시아 화인 이야기

9. 태국의 화인친구 '차이리(李)'     

태국의 상당한 재력가 집안의 화인 친구 리(李)가 나에게, “우리가 돈을 번 일 중에 가장 신났던 때가 언제인 줄 아시나?" 리가 사뭇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돈벌이 경험담을 얘기한다.

"농지법 개정 때, 농사를 짓던  태국인들이 그때까지 매매가 제한 되었던  논밭을 팔 수 있게 되었어.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목표로 한 방콕 근교의 대단위 농지의 지역으로 가서  농지의 이쪽 끝에서 농지를 한 필지 씩 사들어가기를   시작했어. 그리고 저쪽 끝까지 모든 필지를 사는데 수개월은 걸렸지. 저쪽 끝까지 아직 매수가 다 끝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쪽에 사들인 농지를 차례로 팔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사들이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팔고 있었지. 처음 팔 때는 두 배 정도 남겼는데 점점 값이 좋아져 최고 십배까지 남겼어. 수십만 평의  농지거래가 모두 끝낼 때까지 일 년도 안 걸렸어." 솔직하게 무슨 농지법이 어떻게 바뀌었고 왜 타이인 농부들이 팔아야 했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지금에 와서  차이리의 얘기를 확인하려고 인터넷 검색을 아무리 해봐도 알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다.

차이리는 차오저우 출신 화인  2세이다. 그는 나한테 알루미늄 압출 플랜트를 턴키조건으로 산 사람이다. 내가 아는 수많은 태국 화인들 중에 지금까지 연락 안 하고 살기로 작정한 유일한 인간이다. 차이리의 장모(丈母), 닥터  프랏이란 사람이 중견 사업체 그룹 사하베라(가명)의 회장이다. 그녀는 나이 사십이 될 때까지 사업이라고는 모르는 일반 가정 주부로 살았는데  남편이 사망하는 바람에 부득이 기업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사하베라라고 하는 회사는 철강사업을 주 종목으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건축용 철근을 생산했다.

그녀가 사업을 어어 받고 그녀는 부동산에 눈을 돌려 방나트라드  도로 주변의 땅을 사고팔았다. 그리고 그녀가 의외로 부동산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었는지 거래하는 건마다 돈을 벌었다. 하기야 당시에 방콕만 동쪽 날개로 이어지는 방나트라드 도로가로 수많은 일본회사가 들어오면서 땅값이 천정부지로 뛸 때이니까  운이 뒤따르기도 했지만 그녀는 얼마 안 가서 태국에서 몇째 안 가는 땅부자가 되었다.

차이리가 나와 함께  방나트라드 도로를 같이 달릴 때  차창밖의 어느 지점을 가리키며, 하는 말,  "저기 저 땅이 우리 땅이야."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또다시 , "저기 저 뾰족한 건물 보이지?"  내가 그가 가리키는 쪽을 내다볼 때 그는,  "그쪽  일대도 우리 땅이야." 이제는 짜증이 날 정도이다. '알았으니 그만 자랑해!'라는 소리는 속으로만 한다.

닥터 프랏 회장은 사위가 둘 있는데 차이리가 첫째 사위이다. 그의 부인 '주'는 회장의 첫째 딸인데 키가 작고 단아한 전형적 중국사람 모습을 한 여자이다. 그냥 이웃집 여자 같은 소박한 모습이어서 돈 많은 회사 회장의 딸로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녀를 '미스주'라고 호칭한다. 부모가 중국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교육을 시키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말레이시아 페낭의 중국인 사립학교에서 수학을 했다. 말레이시아의 페낭섬은 유독 중국인 인구 비율이 높아 중국문화가 많이 남아있어 싱가포르와 더불어 말레이내의 소 중국이라고도 불렸다. 나 자신도 70년대 말 그곳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해안을 따라 줄지어 있던 아름다운 리조트 호텔들의  낭만 적인 풍경을 잊을 수 없다. 특히 내가 묵었던 호텔 '라싸사양'은 해변 모래사장이 호텔정원이고 야자수가 내려 쪼이는 햇볕을 막아 그늘로 가득했다.

솔직히 당시 한국에는 그런 정도의 리조트 호텔은 어느 해안에도 없었던 때여서 이국의 사치스러운 낭만을 만끽했었다. 나의 젊은 시절의 추억이다.

무슨 이유였던지   차이리는 장모인 닥터 프랏 회장에 대한 얘기가 나올라치면 즉시 손사래를 친다. 싫다는 표현이다. 나에게 토로하기를 장모님하고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며 독립을 하겠다고 한다. 그 첫 시도가 알루미늄 사업이다. 차이리가 지나는 말로 어릴 적 얘기를 가끔씩 하는 것을 들어보면 차오푸라야 강가에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 진학도 못 했다고 하며 그것에 대하여 가끔 열등감을 내 비치기도 했다. 나와는 사업관계를 떠나 좋은 친구를 만났다고 하며 만나면 별 시시껍절한 토픽까지도 같이 수다를 떨었다.

내가 태국에 머물고 있을 때면 늘 나와 시간을 같이 보내곤 했는데 주로 맛있는 중국음식을 같이 찾아다니곤 했다. 맛있는 국숫집을 가려고 수시간의 운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와 내가 최고로 치는 메뉴는 단연  차오저우식으로 요리한 거위찜이다.

사람을 시켜 푸짐한 양을 사 오게 하여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곤 했는데 나도 이 메뉴에 익숙해져 지금도 가끔씩 먹고 싶어  식당을 찾으려 해도 이제는 그런 메뉴를 가지고 있는 식당이 거의 없어졌는지 찾기가 어렵다. 오리의 세배는 될 크기의 거위를 팔각과 오향의 향료를 넣은 간장으로 조리한  찜인데 가격이 비싼 편이라 작은 전문 식당이 조리한 한 마리의 양을 다 팔지 못하면 손해가 클 것이라  거위 메뉴를 없앴다고 추정이 된다.

그래서 작은 전문식당은 한 마리든지 두 마리로 한정을 하고 그 한정 양을 다 팔면 그날 장사는 접는다. 거위는 살코기 말고도 간을 썰어 내온다. 하기야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예부터 거위 간을 최고의  식재로 인정해 왔다. 푸아그라라고 하는 메뉴가 그것이다.

차이리는 목재 사업을 할 때의 이야기도 나한테 해준다.     

태국의 서쪽 미얀마 국경에 매솟(Masot)이라는 국경 도시가 있다. 미얀마로 통하는 국경 관문이다. 미얀마와의  국경 관문은  북쪽 치앙라이 주의 매사이(Mae Sai), 북서쪽의 매홍손(Mae Hong Son), 그리고 서쪽으로 매솟이 있다. 매솟에서 국경을 따라 남쪽을 내려오면 상카부리라는 작은 국경관문도 있다.

그 세 곳의 관문 중 지금 현재 제일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지역이 매솟이다.

그러나 30년, 40년 전에는 지금의 관심과는 다른 이유로 관심이 있었던 지역이다. 현재는 태국으로 넘어오는 미얀마 난민들의 피난캠프가 있어 수만 명의 난민들이 수용되어 있다.

인권침해 문제가 있다고 하여  세계 각국에서 온 NGO들의 활동지역이다. 뿐만 이니라 미얀마의 노동력이 들어오는 관문이다. 태국도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일자리를 찾아 불법으로 들어오는 인력이 상당하다. 그중에 인구가 제일 많은 미얀마 인력이 제일 많다. 그러나 당시에는 화인들이 미얀마 깊은 숲에서  카렌족이 불법으로 벌채하여 오는 티크 목재를 확보하려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리고 있는 현장이었다.

티크(teak)라고 하면 최고급 목재의 대명사이다. 티크의  은은한 갈색의 가구는 사람들을 매혹시킬만치 아름답고 고급스럽다. 영국이 버마를 식민지로 만들어 통치하러 들어왔을 때 지천으로 뒤덮여 있는 숲과 그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의 대부분이 티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일본이 조선에 들어와서 원시림으로 자란 소나무를 도륙을 낸 것처럼 영국인들도 티크를 도륙을 냈다. 도륙을 냈다고 하는 거칠고 속된 표현이 거슬린다면 벌목을 해서 유럽으로 가져갔다고 하자. 티크는 동남아시아의 태국, 라오스,  미얀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인도에서 자란다. 그중에서도 미얀마(버마)가  유달리 흔하게 자라기 때문에  미얀마를 티크의 고향(home  of  teak)라고 일컫기도 한다.

영국이 물러간 후에 들어선  군부독재정권은 무차별 벌목을 감행하여  산림을 황폐화시켰다.

2014년에 들어와서야 원목 수출을 금지시켰고, 2016년에는 벌목자체를 제한했다. 살기가 괜찮은 말레이시아는 아예 모든 수종의 벌목자체를  금지시킨 바 있다. 차이리가  티크 수매 쟁탈을 위해 들어가 있던 곳이 매솟 국경관문 지역이었다.

당시  미얀마와 태국의 국경관문이 있는 매홍손이나 매솟 안쪽 산악지대에는 미얀마 정부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카렌족 반군들이 벌목사업을 관장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 사람들과의 거래는 불법거래이다. 카렌족의 자치정부는 미얀마나 태국이 인정하지 않는 테러 집단이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하는 사업이었어." 차이리가 그때를 회상하며 말한다. "총을 들이대고 위협을 하는 것은 다반사였다고. 돈을 강탈당하기도 했고" "위험을 감수할 만큼 이윤이 컸던 모양이죠?"

차이리는 그냥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티크 목재사업은 우리 중국인 이주자들이 늘 해 왔던 사업이었어."

태국 북쪽 치앙라이주에서 미얀마로 들어가는 국경관문이 있는 곳이 매사이(Mae Sai)다.

골든 트라이 앵글로 알려진 지역에서 가장 큰 타운이다. 국경시장이 제법 크게 발달하여 있다. 미얀마에서 들여왔다고 하는 보석들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짙은 녹색의 에메랄드와 붉은색 루비,  태국산이나 캄보디아산이라고 하는 블루사파이어를 관광객 대상으로 판매한다.

미얀마로 들어가려면 일일 비자를 받아야  한다.

신청서를 작성하여 여권과 함께 제출하고 얼마간의 비자수수료를 내면 비자를 발급해 준다.

관문은 두나라 사이에 있는  좁다란 강을 건너는 다리인데 건너자마자 바로 미얀마 국경시장이다. 태국 쪽 국경시장보다 훨씬 조악한 물건들을 판다. 한국 드라마 시디를 단돈 몇 푼만 주면 살 수 있다. 태국에서 단속이 되고 있는 레드 시디가 있다고 옆구리를 찌르는 청년도 있다.

버마음식을 제공하는 허름한 식당도 몇 개 있다.

치앙마이로 되돌아오는 길을 주도를 택하지 않고  매사이에서 국경을 따라 우회로 나있는 산악도로를 택하여 돌아올 수도 있다. 팡(Fang)이란 타운을 목표로 하고 길을 찾아가면 길을 잃을 염려는 훨씬 적어진다. 하기야 지금은 구글맵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길을 잃고 헤맬 일은 없지만 그런 것이 없던 시절에는 자칫 길을 잘못 들어서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었다.

원래의 메인 도로로 돌아오는 것보다 서너 시간은 더 걸릴 것이지만 시간에 붙들려 매어 살길이 있을 것인가? 군데군데에서 힐 트라이브 피플(hill  tribe  peaples)이라고 하는 산악 소수민족들 마을을 지나간다. 우리 역사에서 삼한시대 사람들이 짖고 살았음직한  초막집의 마을은 내 전생(前生)에서 내가 살던 마을이다 여자들 의상에 색색의 수를 놓아 치장한 전통의상을 입고 지내는 사람들인 아카족,  라후족,  리수족,  샨족들을 만난다. 쉼터가 마련된 마을에서 따듯한 국화(菊花) 차도 마실 수 있다. 그런데 이 길을 드라이브하는 동안  지나는 모든 곳이 민둥산이다. 센스가 좀 남다른 나의  감각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벌목을 해 버렸구먼.  아주  철저하게 해 버렸구먼.' 두나라 국경의 미얀마 쪽은 울창한 삼림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오래전 칸차나부리주를  지나서 가는 상카부리라는 국경관문이 있는 타운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관문초소를 절차도 받지 않고 몰래 통과하여 미얀마로 넘어갔었다.

정확히 24킬로  거리를 진입했다. 그리고 울창한 삼림 속으로  들어가서 송어를 잡아 회를 처먹고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젊었을 때의 대책 없는 호기로 그런 터무니없는 짖을 했었다. 

즉 민둥의  태국지역을 넘어가면 바로 울창한 삼림의 미얀마다. 얼마나 울창한가 하면 대낮의 삼림 속은 밤인 듯 어두웠었다. 태국도 옛날 어느 때에는 그랬을 것이지만 지금은 민둥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태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 이주자들의 짖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목재사업으로 돈을 번 화인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어디에서 목재를 구하여 팔았을까? 그 증거를 찾아보려고 해도 그런 기록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최근 미얀마와의 중국접경에서 불법으로 벌목을 한 중국인 153명을 체포했다고 하는 뉴스를 구글 뉴스에서 보았는데 지금의 그 사람들이나, 7,80년 전의 태국 화인이나,  내 친구 차이리나,  무엇이 다를 게 있나?

방콕에서 요즈음 뜨고 있는 새로 만든 시장이 있다.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개장을 한 시장인데  태국 특산물 전시장,  먹거리 코너,  놀이기구로 꽉 채운 놀이터,  화장품코너 등을 갖추어 놓은 대단위 쇼핑몰이다. 엄청난 너비의 시장이다.

이 시장 이름이 아시아티크(Asiatique)이다. 차오프라야 강변부두의 '고당'을 시장으로 개조한 것이다. 고당이란 말은 물류창고의 태국말이다. 아시아티크의 티크가 티크 목재를 말하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티크목재를 선적하던 부두였으나 지금은 티크를 선적할 일이 없어 버려진 부두였다. 누군가가 아이디어를  내어 중국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으로 개조한 것이다. 얼마나 티크목재를 많이 거래를  했으면 그 엄청난 너비의 부두가 필요했었을까?

이 티크목재와 국경의 민둥과 어떤 함수관계가 성립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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