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부 태국의 3대 거부
1. CP 그룹 이야기
씨아엑초(謝易初) 형제 산터우(汕頭)항에서 배를 타다.
내 나이 30살이 되는 때부터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왕래하면서 그곳에서 만나 교우했었던 중국이민자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몇 달의 시간을 그들과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살았다. 그들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에 대해서는 뭐라고 딱히 정의하기는 쉽지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편의 세계사적 '역사의 흐름' 이라고나 할까?
이번에는 나의 중국 이민자 지인의 얘기가 아닌 태국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한 기업가 가족의 이야기를 여러 자료를 뒤지면서 발췌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이 글의 첫 장에서 중국 광둥 성 산터우(汕頭)항에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배를 탄 그들, 특히 차오저우(潮州) 사람들 이야기를 언급했었다. 지금 얘기할 사람도 그중에 한 사람, 아니 한가족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현재 태국의 국민소득의 10%를 점유하고 있는 거인(巨人) 가족, CP그룹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정리해 둘 것이 있다. 동남아 화인들, 그리고 그 집단이 불과 지난 50년에서 100년 동안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얼마만큼의 부를 이루었고 이루어 놓은 부가 그 나라 경제에 얼마만 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가의 통계지수를 여기에 정리해 본다. 그리고 내가 지금 얘기하려는 CP그룹은 그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이다.
태국 화인 인구 비례; 10%, 경제력; 80% 이상.
필리핀 화인 인구비례; 1.3% 경제력; 60% 이상.
싱가포르 화인인구비례; 77% 경제력; 80% 이상.
인도네시아 화인 인구; 4% 경제력; 80% 이상.
말레이시아 화인; 25% 경제력; 60% 이상.
물론 위의 숫자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의 경우 세금 납부 기준으로 보면 90%도 상회한다고 하니 어떤 기준으로 경제력을 표시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다만 전체적인 양상을 설명하는 데는 부족한 점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한국은 그들과 왜 다른가? 그것은 딱 한 가지, 조선과 한국은 그들의 정착을 반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쫓아냈다. 한국에서는 소위 차이나타운이라고 하는 집단 거주지를 말살했다. 그들은 울며 불며 그들이 태어난 대한민국을 등지고 대만으로, 미국으로 떠나갔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차이나 타운이 형성되고 있는 현실을 맞고 있다. 그리고 옛날에는 상상도 못 할 소위 정치적 친중세력(親中勢力)까지도 형성되어 있다고도 하는데, 그러한 현실이 어떤 역사로 흘러갈 것인지 알 수 없다.
광둥 성의 동편 구석의 차오저우 지방의 청하이(淸海) 지역의 작은 마을에 사는 씨아엑초(謝易初)는 그의 막내 남동생 씨아시우가(謝少飛)와 함께 1919년 산터우(汕頭)항에서 태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태국이라는 신천지로 가서 펼쳐 보일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씨아엑초는 1896년생이고 그가 배를 탄 해가 1919년이니까 그의 나이 23세가 되던 해였다. 산터우 항에서 배를 타고 떠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에서의 너무나 가난한 삶을 피해 신 세계에서 일자리를 구해가는 사람들이었지만 씨아씨(謝氏) 형제는 가난을 피해 서만 배를 탄 것은 아니었다. 씨아엑초는 다섯 명의 형제자매 중 맏이인데 아버지가 불과 30세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족을 이끌어야 했다. 남자 형제가 셋, 그리고 누이가 둘이었다. 그의 가족은 조상이 남겨준 토지가 꽤 있어 토지 임대료만 받는 것으로 특별히 일을 하지 않아도 생활에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의 바로 밑 남자 동생이 학교 성적이 매우 좋았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가 공부를 계속하도록 밀어주기로 결정을 하여 쓰촨 성 성도(城都)로 유학을 보냈다. 왜냐하면 차오저우에는 상급학교의 대학이 없었던 관계로 그 먼 성도로 갈 수밖에 없었다. 성도는 매우 먼 곳이기도 하거니와 학비와 생활비가 많이 들어 토지 임대료 수입은 그의 학비등을 충당하는 것으로 다 소진되는 바람에 씨아엑초와 나머지 형제들은 다른 일을 하여 돈을 벌어야 했다. 그때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씨앗장사(種苗)였다. 차오저우 사람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니 그들 모두가 씨앗장사의 고객이었다. 장사가 꽤 잘 되어 문제가 없었으나 씨아엑초는 그런 정도로 만족할 수 없어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를 원했다. 그가 생각하는 신세계 후보지는 홍콩과 태국, 그리고 말레이시아 등지이었는데 그는 태국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유는 태국만이 다른 나라들과 달리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기 꺼으로 돈을 벌었을 때 유럽의 그런 나라들이 수탈을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참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20세기 초 까지 태국정부가 중국인들의 이주를 받아들여 주어 이미 태국으로 간 차오저우인을 비롯한 중국인 숫자가 상당하였고 이들이 무엇을 하여 그곳에서 삶을 영위할까를 생각하면 대답은 간단할 것이다. 그들은 농사꾼이다. 곡물이거나 채소의 종자씨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가지고 가는 짐은 모두 종자씨였다. 씨앗, 사료, 축산, 새우. 씨아엑초 형제는 다른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그렇듯이 짜오푸라야 강변에 중국인들이 조성한 집단 거주지 차이나 타운에 정착하였다. 1921년 차이나타운에 씨앗 가게를 열고 가게이름을 씨아타이(chia Tai)라고 지었다. 오늘날 CP그룹의 최초 태국 사업의 효시다. 'Airplane'이라는 상표도 만들었다. 우리나라 삼성의 창립자 이병철 회장이 대구에 삼성상회라는 가게를 연 것이 1938년이었고 씨아엑초가 방콕에 씨앗가게를 연 때가 1921년이니까 삼성보다 17년을 앞선 때에 CP 그룹 모태가 생겨난 셈이다. CP는 짜런 폭판드(Charoen Pokphand)라는 태국어 회사명의 이니셜을 따서 부르는 이름이다. 물론 당시의 한국은 일제 강점기의 주권도 없는 최빈국 가난한 나라였고 태국은 아시아의 경제 강국이었으니 배경이 전혀 다른 형편 이어서 비교 자체가 무리 이겠지만 역사는 이렇게나 저렇게나 흘러가는 것이니까,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 속의 삼성, 그리고 CP그룹을 비교해 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CP는 씨앗 장사로, 삼성은 농산물 유통과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기본적으로 인구도 많고 땅덩어리가 큰 중국을 우리가 대국(大國)이라고 일컬을 만치 중국인들은 활동 범위도 커서 그들은 일찍이 동남아시아를 그들의 활동 영역으로 삼았다. 씨아타이 씨앗가게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대만, 홍콩 등지에도 채소씨를 팔았다. 물론 그들의 중국인 연줄을 통해서 유통이 되었겠지만. 중국 남방인 광둥 성의 채소는 열대지역인 태국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재배에 하등의 문제가 없어 차오저우의 고향에서 들여온 씨앗은 쉽게 유통되었다. 작은 규모지만 돼지와 계란도 수출했는데 계란을 생산하려면 양계를 해야 했다. 그러나 양계는 기술 문제도 있고 사료 확보도 어려워 별 재미는 보지 못했는데 일단은 구매처를 확보한 이점을 살려 성계를 구매하여 식당이나 소매상에 판매를 했다. 그러다가 1953년 동물사료를 생산하는 공장을 설립했다. 그라인더와 믹서기를 갖춘 태국 최초의 현대식 설비를 갖춘 사료 공장이다.
이 사료제조 사업이 사실상 CP의 사업 성격을 특징 지우고 도약하는 첫걸음이었다.
중국에서 수입하던 채소씨앗도 자체농장을 마련해 태국에서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4년에 씨아엑초 설립자의 넷째 아들 다닌 찌야 와놓은(Dhanin Chearavanont, 謝國民 Chia kokmin)이 사장( General director, 오늘날 CEO)에 취임했다. 찌야논(Chearavanont)이라는 성(姓)은 씨아(謝)라는 중국성을 태국 성으로 바꾼 창씨개명이다. 당시 25세의 젊은이일뿐더러 여러 아들 중에 넷째인데 왜 그를 파격적으로 최고 경영자로 임명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2020년 현재의 그는 81세로 거대 CP 그룹의 영수로 군림하고 있다. 또한 2017년 포브스에서 찌야 와놓은 가족이 아시아에서 4번째 부자로 발표하고 있는 그 가족의 영수이다.
다닌 찌야논은 태국 방콕 외곽의 라차부리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상급학교는 아버지 고향 중국의 차오저우로 보내져 산터우(汕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1956년에 홍콩대학에서 수학하고 태국으로 돌아와 국방대학을 졸업했다. 한국의 삼성이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 이건희가 삼성의 총수가 된 것과 비견된다.
CP그룹의 다닌회장이 1939년생이고 이건희 회장이 1942년 생이니까 나이 차이도 별로 없다.
이건희 회장은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왔고 다닌 회장은 중국과 홍콩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다. CP그룹의 다인회장의 형들 모두는 CP그룹 내의 사업 부문을 각자 맡아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찌야 와놓은 가족의 일원이다. 그러나 삼성의 이건희 회장의 형들은 삼성에서 일하지 않는다. 내가 쓸데없는 것으로 과장하는지는 몰라도 중국인과 한국인의 가족문화가 많이 다른 것은 항상 느껴왔던 일이라서 꼭 쓸데없는 일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 1970년대 까지 양계는 그렇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아 사실상 고전을 했다. 그런데 방콕은행이 어떤 망해버린 대단위 양계장을 인수 제안을 해왔다. CP는 이를 인수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이 사업을 관리했다. 병아리를 농부들에게 나누어 주고 양계방법을 교육하여 기르게 하고 CP는 판매를 담당했다. 판매를 태국 내로 한정하지 않고 국제시장에 진출했다. 멕시코, 대만, 포르투갈, 중국, 인도네시아, 터키, 미국 등지에 팔았다. 물론 자기들이 생산한 사료를 써서 양계를 하였으며 돼지고기 축산까지로 확장했다. 그리고 새우 양식을 시작하였는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독보적 위치를 점유했다. 명실공히 세계의 모든 새우 양식은 CP의 기술이 주도하였고, 중국이든, 베트남이든 오늘날 새우양식을 산업화하여 시행하는 거의 모든 아시아국가는 CP가 관여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 할 것이다. 그리하여 CP는 양계 사업을 독점했다. 양계사업의 산물은 닭과 계란이다. 양계로부터 도축 그리고 먹거리로 가공, 더 나아가서 레스토랑 체인으로 범위를 넓혔다. 미국의 닭고기 세계적 체인 KFC와 제휴하고 태국 라이선스를 획득했다. 사료부문도 국제적으로 사업 범위를 넖혔다. 1972년에 인도네시아에 사료공장을 짓고 일본, 싱가포르에는 병아리 수출을 시작했다. CP는 동남아시아 제일의 소매점 사업 체인인 7-eleven을 개점하여 2019년 현재 전국에 12,000개의 점포를 운영한다. 2만 개의 점포를 가진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이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세계적 도소매 마트 체인 마크로(Makro)를 인수했다. 마크로는 한국의 미국 브랜드 코스트코, 이마트 트레이더스 와 비슷한 창고형 대형 도소매 마트이다. 태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여기서 많은 한국 식품을 살 수 있다. 고추장 된장등의 모든 장류, 김이나 미역, 라면을 비롯한 국수류, 콩나물, 김치, CJ 등의 식품 회사들의 인스턴트 가공 식품등, 웬만한 식재를 구입할 수 있다. 여러 종류의 한국 소주도 살 수 있다. 마크로는 밀집 인구 경제거점 어디에든 세워져 있다. 방콕에만 9개 점포가 있다. CP는 1978년 중국이 경제 개방정책을 취하자 재빨리 중국으로 들어가 외국인투자 회사로 등록한다. 그리하여 CP는 중국의 최초 외국인 투자회사로 등록이 되었다. 회사 등재번호가
0001이라고 한다. 선전과 광둥을 거점으로 모든 식품 시장에 뛰어들어 사실상 중국인의 식생활 관습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90년대에 들어와서 중국의 CP그룹 자회사가 200개에 달했다. 중국 본토의 CP그룹은 그룹 이름을 씨아타이(Chia Tai, 正大)라고 통용된다. 중국 전체 먹거리 공급의 20%를 점하고 있는 중국의 최대의 외국투자자이다. 쓸쓸히 중국 시장에서 철수한 한국의 롯데 그룹과 비견되는데 어쩐지 한국회사가 중국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족주의와 정치적 이유가 한계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는 하는데 기우이었으면 한다. 롯데와 CP! 이 두 기업군은 아주 유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CP가 중국에서 태국으로 이주한 사람이 태국에서 사업을 일으켜 성공하고 그 자본을 고국으로 가져와 사업을 일으켜 양국에서 승승장구로 사업을 수행하는 것과 롯데의 신격호가 일본으로 이주하여 사업을 일으켜 성공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일으켜 성공하고 양국에서 공히 성공적인 사업을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배경이다. 시대적인 배경은 CP가 좀 앞서 있지만 식품유통을 주력 사업으로 설정한 점에서도 같다. 단지 사업 규모면에서는 CP가 훨씬 크다는 점에서는 다를 수 있지만 한국과 태국, 일본과 중국에서 모두 손꼽히는 재벌 기업군이다. 그러나 CP의 거점인 중국에 투자했던 롯데가 철수했다. 자진철수였는지, 쫓겨났는지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비추어지겠지만, 하여튼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CP가 롯데의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CP는 일본의 혼다, 미국의 월마트, 영국의 테스코와 제휴하여 중국시장에 진출하고 7- eleven, KFC, 상해의 혼다 오토바이 제조, 독일의 하이네켄 맥주등의 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한편 다닌회장은 그의 형 두 명에게 그들의 초기 사업이었던 씨앗과 동물사료를 각각 맡겼다. 그리고 CP는 90년대에 들어와서 통신 사업에 진출했다. 미국의 NYNEX와 조인트벤처로 2백만 전화선 구축, 위성과 케이블 티브이, 모바일 전화 서비스가 그 내용이다. TRUE라는 이름으로 AIS, DeTac과 함께 태국 3대 통신사의 하나가 되었다. CP는 금융분야에 진출을 시도하여 중국 금융서비스 평안보험의 최대 주주가 되었고,
또한 중국 국영 투자신탁회사, CITIC의 대주주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도로 거대 일본 종합상사 이토추의 주식을 인수하여 대주주 반열에 섰다. 2019년 미국 미디어 그룹 메리디스 코퍼레이션으로부터 경제잡지 포천(Fortune)을 인수하기도 했다. 이 보다 먼저 CP는 1997년 태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아시아를 강타한 금융위기를 맞고 대대적인 그룹 사업 정비를 했다. 1997년 태국으로부터 시작된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시련을 겪게 되자 방만한 사업들을 합종연합과 통폐합으로 그룹 조직을 정비했다. 메인 브랜드는 'CP Food', 7 eleven의 소매사업은 'CP All', 통신은 'True group'으로 나누고 주식지분을 정비하여 능률적인 경영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 이후 중국에서는 '씨아타이'로 활발히 그리고 승승장구로 사업을 확장해 나간다.
그리고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것은 CP가 북한에도 진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소문이다.
중국에서 그들이 생산하는 사료와 북한의 싼 인건비로 양계 축산을 하여 한국에 판다는 계획,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대단한 기업집단 그리고 그 그룹의 대주주 찌야논(Chearabanont) 패밀리가 어떤 분야에서는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다른 패밀리가 있다.
쇼핑센터와 백화점, 할인마트, 슈퍼마켓등의 리테일 판매의 유통을 주 사업으로 하는 기업군인 센트럴 그룹(Central Group)이다.